
학계의 조용한 불의
학계의 실질적 토대를 떠받치는 연구 인프라 인력들이 학술 동료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문제 제기가 호주를 중심으로 거세지고 있다. 호주의 학계 전문가 팻 메타롬(Pat Metharom)과 사치 자야싱헤(Sach Jayasinghe)는 Times Higher Education에 기고한 글에서 현대 연구 인프라가 고도로 전문화된 역량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대학의 직무 분류 체계가 이를 반영하지 못해 '조용하지만 심각한 불의'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두 전문가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이 성별이나 인종을 넘어 직무 전반에 적용되어야 하며, 이는 호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연구 인프라 인력은 실험 설계, 새로운 분석 방법 개발, 맞춤형 기기 및 프로토콜 구축, 대학원생 교육, 그리고 연구 프로그램을 뒷받침하는 독점적 지적 재산 생성 등 고도로 숙련된 전문 지식을 제공한다. 이들 중 다수는 박사 학위를 보유하고 있으며, 일부는 학술 경로만으로는 축적하기 어려운 수십 년간의 공학·기술·산업 현장 경험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시스템과 학계 문화는 이 전문가들을 대체 가능한 단순 지원 인력으로 취급하며, 전문성을 육성하고 유지해야 할 핵심 인력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두 전문가의 비판이다. 고용 조건, 공로 인정, 경력 발전 기회가 학술 동료들과 분리되어 있어, 학술적 역할과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실질적 불이익을 감수하는 구조다.
이 문제는 재정적 불균형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연구 인프라 인력들은 전문성에 걸맞은 경력 발전 경로나 공식적 인정 수단을 갖추지 못한 채 사실상 정체된 상태에 놓여 있다.
호주 대학들은 현재 노조와 다음 단체 협상 계약(EBA)을 논의 중이며, 메타롬과 자야싱헤는 이 협상이 임금과 처우 조건을 재설계할 현실적 기회라고 제안했다. 기존 직무 분류 체계가 행정직이나 기술 지원직 중심으로 설계된 탓에 현대 연구 환경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광고
해외 선진 사례와 비교
영국과 미국은 이미 연구 인프라 인력을 위한 경력 경로를 재설계하며 개선을 주도하고 있다. 두 나라의 주요 대학과 연구 기관들은 연구 지원 전문직을 별도의 직군으로 분류하고 경쟁력 있는 급여 체계를 도입했다. 호주 일부 기관도 이에 준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아직 해결책을 모색 중이다.
두 전문가는 여러 과학 분야를 아우르며 방법론을 번역하고 연구 설계에 엄격함을 더하는 연구 인프라 인력들이 학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직무 분류 체계를 개선하고, 경쟁력 있는 급여와 전문성 개발 기회를 제공해야 연구 기관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국내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에서도 연구 지원 인력의 처우 격차는 오랜 기간 제기되어 온 이슈다. 정규직·비정규직 이분법적 고용 구조 속에서 연구 인프라 인력들은 프로젝트 단위 계약직으로 묶이는 경우가 많아 고용 불안과 경력 단절이 반복된다.
연구 성과의 상당 부분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면서도 논문 저자 목록이나 특허 기여자 명단에서 배제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는 단순한 처우 문제를 넘어 연구의 질과 장기적 성과물을 좌우하는 구조적 문제다.
한국 학계의 방향성
일각에서는 연구 인프라 인력의 급여를 학술 동료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연구비 예산 부담이 커진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숙련된 연구 인프라 인력의 이탈이 장기적으로 더 큰 비용을 초래한다고 반박한다. 경험과 노하우를 갖춘 전문가가 떠난 자리를 채우기 위한 채용·교육 비용, 그리고 연구 연속성 단절에 따른 손실이 처우 개선 비용을 상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우 개선을 단기 비용이 아닌 장기 투자로 바라보는 시각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 학계가 나아갈 방향은 분명하다. 연구 인프라 인력을 '숨겨진 조력자'에서 '공식적인 연구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도록 직무 분류 체계를 전면 재검토하고, 호주·영국·미국의 선행 사례를 참고한 경력 경로 설계가 필요하다.
광고
이와 함께 연구 성과물에 기여자로 명시하는 제도적 장치, 그리고 안정적 고용 형태 보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연구 인프라 인력의 처우 개선은 연구의 품질과 효율성을 실질적으로 높이는 정책적 전환점이 될 수 있다.
FAQ
Q. 연구 인프라 인력의 대우 개선이 왜 중요한가?
A. 연구 인프라 인력은 실험 설계부터 분석 방법 개발, 독점적 지적 재산 생성까지 연구의 전 과정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한다. 이들이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 전문 인력 이탈과 경험 단절로 이어져 연구 역량 전체가 약화된다. 학술 동료와 동등한 처우를 보장할 때 연구 인프라 인력의 전문성이 안정적으로 축적되고, 그 결과가 연구 성과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진다. 영국과 미국의 사례는 처우 개선이 기관 전체의 연구 경쟁력을 높이는 실질적 전략임을 이미 입증하고 있다.
Q. 한국에서는 어떤 제도적 변화가 필요한가?
A. 우선 현행 직무 분류 체계를 재검토하여 연구 인프라 전문직을 독립적인 직군으로 분류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프로젝트 단위 계약직 중심의 고용 구조를 개선하고, 장기 고용과 경력 개발 경로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또한 논문·특허 등 연구 성과물에 기여자를 공식 명시하는 관행을 정착시켜 공로 인정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 정부와 대학이 함께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다.
Q. 해외 선진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A. 영국과 미국의 주요 연구 기관들은 연구 지원 전문직을 별도 직군으로 분류하고, 단계별 승진 체계와 경쟁력 있는 급여 구조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숙련 인력의 장기 근속을 유도하고 기관 내 연구 노하우가 축적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냈다. 한국이 참고할 핵심 교훈은 처우 개선을 비용이 아닌 연구 경쟁력 강화를 위한 투자로 인식하는 정책적 관점 전환이다. 호주의 단체 협상(EBA) 사례처럼, 노조·대학·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협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실효성 있는 접근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