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신탁재산 범위 내에서만 책임집니다"라는 말의 무게
오피스텔, 지식산업센터, 생활형숙박시설 등 비주거용 건축물 분양계약을 체결해 보신 분이라면, 계약서 어딘가에서 이런 문구를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수탁자는 신탁재산 및 신탁업무 범위 내에서만 책임을 부담한다."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계약서 문구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이 짧은 한 줄이 실제로는 수분양자에게 치명적인 불이익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분양사업이 실패하거나 입주가 지연될 경우, 신탁사가 자신의 고유재산으로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탁재산(프로젝트 재산)의 범위 내에서만 배상하면 그만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신탁재산이 텅텅 비어 있다면? 수분양자가 돌려받을 수 있는 돈도 사실상 없어지는 것입니다.
대법원은 2026년 2월 26일, 바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중요한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2023다280945)

법무법인 휘명 박휘영 대표변호사
사건의 개요
원고 A는 창원시 진해구에 위치한 오피스텔 1호실을 분양받기 위해 2018년 관리형 토지신탁의 수탁자인 코람코자산신탁 주식회사(피고)와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계약금으로 약 1,800만 원을 납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입주가 지연되자 원고는 2020년 계약 해제를 주장하며 계약금 반환과 위약금 지급을 청구하였습니다. 이에 피고 코람코자산신탁은 공급계약서에 기재된 이른바 '책임한정특약', 즉 "수탁자는 신탁재산 범위 내에서만 책임을 부담한다"는 조항을 근거로 배상 책임을 사실상 거부하였습니다.
1심부터 항소심,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3심 모두 원고(수분양자)의 손을 들어주었고, 최종적으로 원고는 약 1,500만 원을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법무법인 율촌이 피고를 대리하였으나 끝내 패소하였습니다.
판결의 핵심 — "책임한정특약은 반드시 설명해야 할 중요한 내용"
이 판결에서 대법원이 주목한 법적 쟁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책임한정특약이 약관법상 설명의무의 대상인가?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약관법) 제3조 제3항은 사업자에게 구체적이고 상세한 설명의무를 부과하고 있으며, 같은 조 제4항은 사업자가 설명의무를 위반하여 계약을 체결한 때에는 그 약관의 내용을 계약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관리형 토지신탁의 수탁자는 신탁사무의 처리상 발생한 채권을 가지고 있는 수분양자에 대하여 신탁재산은 물론 수탁자의 고유재산으로도 책임을 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책임한정특약은 바로 이 원칙을 수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분양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내용'에 해당합니다.
즉, 수분양자가 계약을 맺을 때 별도의 설명 없이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불이익을 초래하는 조항이므로, 사업자가 반드시 명확하게 설명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코람코자산신탁은 설명의무를 이행하였는가?
항소심 재판부는 ① 계약서 말미의 '계약의 설명 및 숙지'란에는 포괄적인 문구만 기재되어 있었을 뿐 구체적 설명이 없었고, ② 수분양자가 별도로 자필 서명한 '분양계약자 확인서'에도 책임한정특약과 무관한 내용만 기재되어 있었으며, ③ 공급계약이 수분양자로 하여금 신탁원부를 확인하도록 규정하고는 있으나, 신탁원부에 포함된 관리형 토지신탁계약서는 수십 쪽에 이르고 어느 조항이 책임한정특약인지 지칭하지 않았으며, ④ 책임한정특약이 다른 일반 조항과 동일한 색깔·크기·글자체로 구분 없이 기재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설명의무를 다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대법원도 이러한 항소심의 판단에 약관법상 설명의무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고 판시하며 상고를 기각하였습니다.
이 판결이 실무에서 갖는 의미
① 신탁사의 "우리 책임은 신탁재산으로만 한정"이라는 주장이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이 판결 이전에도 하급심에서는 책임한정특약의 효력을 부정하는 판결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 판결은 관리형 토지신탁 분야에서 이 쟁점을 명확히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각별합니다.
수분양자 입장에서 보면, 신탁사가 계약서에 아무리 정교하게 책임한정특약을 넣어두었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면 계약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이제 대법원이 확인한 원칙입니다.
② '계약 설명을 들었다'는 포괄적 문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분양계약 현장에서는 "이 계약서는 모두 설명을 들었으며 숙지하였습니다"는 문구에 서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양사업자들은 이를 근거로 설명의무를 다했다고 주장하지만, 법원은 그와 같은 포괄적 동의 문구만으로는 개별 조항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최근 판례의 방향은 명확합니다. 책임한정특약의 효력은 조항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조항이 계약 체결 과정에서 어떻게 설명되고 받아들여졌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③ 분양계약 해제 후 위약금 청구 소송에서 직접 활용 가능합니다
필자가 현재 수행하고 있는 100건 이상의 분양대금반환 및 채무부존재확인 소송 중 상당수는 관리형 토지신탁 구조를 활용한 오피스텔·지식산업센터 분양 사건입니다. 이들 사건에서 신탁사 측은 예외 없이 "책임은 신탁재산으로 한정된다"는 주장을 방어논리로 내세웁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그러한 주장을 정면 반박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법제도적 개선이 필요합니다
이번 판결은 분명 반가운 진전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설명의무 위반 여부는 계약 체결 당시의 정황, 서면 자료의 존재, 담당자의 설명 내용 등에 관한 사실 인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개별 사건마다 증거 확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한 신탁사들이 향후 "설명을 충분히 했다"는 증거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두는 방향으로 대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입법적 보완이 필요합니다. 건축물분양법 또는 신탁법 개정을 통해 관리형 토지신탁 분양계약에서 책임한정특약을 사용하는 경우, 수분양자에게 별도의 서면으로 구체적 내용을 고지하고 서명·확인을 받도록 의무화하는 규정을 두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신탁재산이 소진된 경우에도 수분양자가 최소한의 계약금만큼은 보호받을 수 있는 보증 제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며
부동산 분양시장에서 수분양자는 언제나 '정보 약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분양사업자와 신탁사가 수백 페이지의 계약서와 신탁원부를 내밀며 "다 읽고 서명하라"고 요구할 때, 일반 수분양자가 그 법적 함의를 모두 파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법원이 약관법상 설명의무를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이러한 구조적 정보 불균형을 법적으로 보정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분양계약서에 적혀 있다고 해서 모든 조항이 유효한 것은 아닙니다. 수분양자가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않았다면, 사업자는 그 조항을 방패로 삼을 수 없습니다.
신탁사로부터 "우리는 신탁재산 범위 내에서만 책임을 진다"는 답변을 받고 포기하고 계신 분이라면, 지금 즉시 계약 체결 당시의 경위를 다시 점검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설명의무 위반 여부는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충분히 검토 가능한 쟁점입니다.
박휘영 변호사는 법무법인 휘명 대표변호사로, 분양계약 분쟁·집합건물 관리·재건축·재개발·토지수용보상 등을 전문으로 하며, 현재 관련 분야에서 100건 이상의 집단·다수 소송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