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화려한 외출

목차
1부 사람에게로 오시는 하나님
제 1장 화려한 외출
하나님께서 외출을 준비하시는 순간
제 2장 옷을 고르는 시간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한 선택
제 3장 빨간 넥타이
사랑의 고백으로서의 상징
제 4장 그와 나, 만남
도시 한복판에서 시작된 동행
제 5장 교회에서 배우는 침묵
말없이 이루어지는 사랑과 기적
제 6장 사찰, 침묵 속의 편견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
제 7장 첫 신앙고백
무너짐 속에서 시작되는 믿음
제 8장 첫 글 기록
기록으로 이어지는 동행의 시작
2부 삶의 현장에서
제 1장 신호등
제 2장 병실의 공기
제 3장 기다림이라는 고통
제 4장 시장에서 사과를
제 5장 값을 묻지 않는 이유
제 6장 현장의 먼지
제 7장 한 가족의 식탁
제 8장 가난한 이웃 따뜻한 선물
제 9장 노숙자의 밤 거리의 기도
제10장 죽음 앞에서의 동행
3부 회복 – 왕의 보좌
제 1장 사랑고백, 기도
제 2장 뜨거운 포옹
하나님의 화려한 외출
머리말
이 책을 발간하며
저는 한 가지 질문 앞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불확실성과 불안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예술과 문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이 책은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화려한 외출」은 과거 속에 머물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곁으로 걸어오시는 하나님을 상상하며
그러나 단순한 상상을 넘어
이미 우리 삶 속에 스며들어 계신 그분을 조심스럽게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이 시리즈 속 하나님은 강단 위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도심의 거리에서
시장의 분주함 속에서
병원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가정의 조용한 식탁 위에서
삶의 무게에 지친 사람들 곁으로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걸어오십니다
이 책은 하나님을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설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교리를 증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리 그 한가운데에 “함께 계심”이라는
장면을 조용히 놓아 드립니다
이 책의 제목에 담긴 ‘화려함’은 권위나 장엄함이 아닙니다
사랑이 가장 깊어질 때 비로소 드러나는 빛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화려함입니다
그리고 ‘외출’은 떠나심이 아니라 우리에게로 다가오심입니다
이 이야기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버텨내고 있는 이들에게
질병으로 밤을 지새우는 이들에게
상실과 외로움 속에서
말없이 무너지고 있는 이들에게
아주 조용히 이렇게 말을 건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이 책에 담긴 그림들은 임파스토 기법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회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두텁게 쌓인 질감
손의 흔적이 살아 있는 화면
그 모든 표현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고통과 위로를 몸으로 느끼게 하는
하나의 경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림을 보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하나님의 손길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껴보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하나님의 화려한 외출」은 병든 자 지친 자 가난한 자
그 어떤 이유로든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이들 곁에 답을 주기보다
저와 함께 일어서기를 원합니다
이 책은 위로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해답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사랑은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글과 그림으로 조용히 증언할 뿐입니다
이 기록은 종교를 넘어 우리의 삶과 존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술과 문화 그리고 신앙 기술과 감성이 만나는 자리에서
신성은 더 이상 먼 하늘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함께 걷고 계신 분임을
천천히 깊이 있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부디 이 책이 누군가에게는 조용한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가슴에 남는 질문이 되며
누군가에게는 다시 걸어갈 힘이 되는 따뜻한 동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에게
오늘에도 그분의 화려한 외출이 이미 시작되어 있기를 기도합니다
2026년 5월
하나님의 화려한 외출
임파스토 디지털 작가 Baek Jong Chan 백종찬

1) 하나님의 화려한 외출
사람에게로 오시는 하나님
제1장 화려한 외출
하나님께서 외출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고요하고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문 앞에 이르러, 그분께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 멈춤은 짧지만 깊습니다.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시간을 가로지르는 기억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 그분 안에서 조용히 깨어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처음 이 땅을 밟으시던 그날.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쳤고,
낯선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으며, 흙 냄새가 아주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의 감각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사람의 체온,
거리의 소리,
불안과 희망이 뒤섞인 도시의 숨결.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긴장도 있으셨습니다.
전능하신 분이지만,
사람의 몸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심장은 낯설게 뛰었고,
감정은 예상보다 더 깊었으며,
사람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아픈 존재였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는 설명할 수 없는 초조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향한 마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그저 끌려가는 마음.
그 마음 하나 때문에 그분께서는 다시 이 길 앞에 서 계십니다.
그 기억이 지금,
작은 불씨처럼 살아나고 있습니다.
꺼지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깊어져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서른 즈음의 심장으로 서 계십니다.
이미 세상을 알고 계십니다.
배신도, 눈물도, 외로움도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사실이 이 외출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분께서는 천천히 거울 앞으로 걸어가십니다.
거울 속에는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모습,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장 온전한 모습.
그분께서는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십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요.”
그 질문은 전략이 아닙니다.
사랑의 방식에 대한 고민입니다.
양복을 떠올려 보십니다.
너무 무겁지는 않을까.
너무 멀어 보이지는 않을까.
구두를 들어 보십니다.
너무 단정하면
사람들이 편안해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하나하나 천천히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옷을 고르기 시작하십니다.
제2장 옷을 고르는 시간
그분께서 옷을 고르시는 시간은 결코 단순한 준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한 가장 섬세한 결정의 시간입니다.
먼저, 바바리코트를 집어 드십니다.
연한 베이지 색.
눈에 띄지 않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는 색.
어디에 서셔도 어색하지 않게 스며들 수 있는 색입니다.
그분께서는 그 코트를 손으로 한 번 쓸어보십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결심에 가깝습니다.
돋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곁에 있기 위해서.
다음으로 네이비 수트를 꺼내십니다.
검정은 너무 멀고 회색은 너무 흐립니다.
네이비.
그 색은 말하지 않아도 신뢰를 주는 색입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존재를 드러내는 색입니다.
그분께서는 그 수트를 천천히 입어보십니다.
어깨에 닿는 감각,
몸을 감싸는 무게.
그 모든 것이 사람과의 거리를 결정합니다.
셔츠는 아이보리.
완벽한 흰색을 고르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완벽해 보이는 순간, 사람은 다가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보리는
조금은 부드럽고, 조금은 현실적인 색입니다.
삶의 먼지를 받아들이는 색.
그분께서는 그 색을 선택하십니다.
이제 넥타이를 바라보십니다.
여러 색이 있지만,
그분의 시선은 한 곳에 머뭅니다.
붉은색.
잠시 아주 잠시 멈추십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으십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고백입니다.
제3장 빨간 넥타이
그날도 그분께서는 문 앞에서 다시 멈추십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오래.
심장은 조금 더 빠르게 뛰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십니다.
베이지 코트,
네이비 수트,
아이보리 셔츠.
그리고— 붉은 넥타이.
그 색은 조용하지만 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넥타이를 손으로 잡으십니다.
그리고 천천히 매십니다.
매듭 하나하나에 마음이 담깁니다.
이것은 꾸밈이 아닙니다.
선언입니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사랑한다.”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지만,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두는 짙은 브라운.
광택보다
시간이 묻어나는 색.
그분께서는 그 구두를 신고 잠시 걸어보십니다.
단단하지만 부드럽고, 무겁지만 편안합니다.
병원의 복도,
비에 젖은 골목,
사람들의 눈물이 떨어진 길.
그 모든 곳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신발입니다.
머리는 완벽하게 정리하지 않으십니다.
조금의 흐트러짐을 남겨두십니다.
그것이 사람 곁에 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문이 열립니다.
아주 조용하게.
바람이 들어오고,
빛이 스며들며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베이지 코트 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립니다.
붉은 넥타이는 심장처럼 조용히 움직입니다.
그분께서는 한 걸음을 내딛으십니다.
그것은 이동이 아닙니다. 만남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조용히 걸어가고 계십니다.
누군가의 옆을 스치고,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마음 문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발걸음이 당신 앞에 멈춥니다.
두드리십니다.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지금, 당신은 그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1부 4장 그와 나, 만남
도시는 밤이었습니다.
네온사인은 빌딩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차들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멈춤 없이, 숨 돌릴 틈 없이.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얼굴들에는 각자의 하루가 남아 있었습니다.
피곤함, 짜증, 체념,
그리고 아주 희미한 기대.
그 속을 백 기자가 걷고 있었습니다.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멈출 줄 모르는 사람의 걸음이었습니다.
백 기자는 베드로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뜨겁고, 직선적이며,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 부르면 돌아보고,
누군가 울면 먼저 반응하고,
누군가 틀렸다고 생각되면 참지 못하고 말해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완벽한 신앙인은 아니었습니다.
자주 흔들렸고, 자주 넘어졌으며 감정이 먼저 튀어나와 후회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사랑.
밤이 깊어질수록 그의 마음은 늘 같은 질문으로 돌아갔습니다.
“주님… 저는 누구입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지금 이 밤에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 질문은 기도이면서도, 어떤 날은 울음이었습니다.
“눈물을 팔아서라도… 믿음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날도 백 기자는 습관처럼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많았지만 마음은 비어 있었습니다.
소리는 넘쳐났지만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때 그분이 도시로 들어오셨습니다.
베이지 바바리코트.
네이비 수트.
붉은 넥타이 누가 봐도 서른 즈음의 남자였습니다.
건강했고, 단정했고, 그리고 이상하게도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분께서는도시를 천천히 둘러보시며 작게 미소 지으셨습니다.
“차도 많고… 조명도 밝고… 사람도 참 많네요.”
말투는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시선은 깊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도시 한복판을 천천히 걸으셨습니다.
멈추셨다가, 다시 걸으시고,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모습은 설교자도 아니었고, 심판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 도시를 처음 다시 만나는 사람 같았습니다.
백 기자는 그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딱 한 걸음 그런데 발걸음이 멈추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가슴을 건드렸습니다.
“뭐지” 그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시간이 아주 잠깐 느려졌습니다.
그 눈빛에는 이유 없는 익숙함이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
괜히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백 기자의 성격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저기 죄송한데요.”
말을 꺼냈지만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 말을 걸었는지 본인도 몰랐습니다.
그때 그 남자가 먼저 웃으셨습니다.
과장되지 않은, 사람 냄새 나는 웃음이었습니다.
백 기자는 느꼈습니다.
이 남자는 이 도시 안에서 조금 밝습니다.
조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체로. 그는 젊었습니다.
서른 언저리. 조금 어설퍼 보였습니다.
신호등 앞에서 차 방향을 잠깐 헷갈리셨고,
스마트폰 지도를 확인하셨습니다.
백 기자는 속으로 웃을 뻔했습니다.
‘도시 사람은 아니시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웃음이 멈추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그 남자에게서 절대적인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압력.
눈에 보이지 않는데
가슴을 눌러오는 힘
젊고, 밝고, 어설픈데 그 안에 틈이 없었습니다.
중심이 있었습니다.
백 기자의 심장이 빨라졌습니다.
쿵. 쿵. 쿵. 이건 호기심이 아니었습니다.
경계도 아니었습니다.
설렘이었습니다.
그 남자가 네온사인을 올려다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와 도시는 여전히 눈이 아프게 밝네요.” 조금 들뜬 말투였습니다.
관광객 같았습니다.
그런데 말이 끝나는 순간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가라앉았습니다.
그분의 눈빛이 아주 잠깐 깊어졌습니다.
그 찰나에 백 기자는 알아차렸습니다.
이 사람은 도시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비난하지도,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사랑하고 계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그 따뜻함이 오히려 압도적이었습니다.
백 기자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습니다. “처음 오셨어요…?”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남자께서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네 아주 오래전 이후로는요.”
가볍게 하신 말씀인데
백 기자의 가슴에는 묵직하게 꽂혔습니다.
‘아주 오래전 그 말 속에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사연이 있었습니다.
추억이 있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약속이 있었습니다.
백 기자의 손에 땀이 맺혔습니다.
그 남자께서 그를 바라보셨습니다.
웃고 계셨지만 눈빛은 사람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비판 없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를 다 알고 계신다는 듯한 시선.
그 순간
백 기자의 마음속 깊은 곳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다가 끝내 말하지 못했던 질문들,
화내고 후회하고
그래도 놓지 못했던 믿음. 그 남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참 바쁘게 사네요.”
도시에 대한 말씀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백 기자 자신의 삶을 향한 말처럼 들렸습니다.
백 기자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습니다.
가슴이 꽉 찼습니다.
이건 만남이었습니다.
우연처럼 시작되었지만
절대 우연일 수 없는 만남.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약속도 없었지만 걸음이 맞았습니다.
그 남자께서 건널목 앞에서 멈추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사람들 많이 지쳐 있죠.”
백 기자의 발끝이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왜 그렇게 보이십니까?”
그분께서 부드럽게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보이니까요.”
그리고 조용히 덧붙이셨습니다.
“네가 매일 밤 같은 질문으로 울고 있잖아요.”
그 순간 백 기자의 발걸음이 멈추었습니다.
숨이 막혔습니다.
“주님 저는 누구입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밤에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 질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백 기자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제가 착각하는 거면… 지금 아니라고 해주십시오…”
믿고 싶은 마음과 두려움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그 남자께서 잠시 멈춰 서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셨습니다.
판단도, 시험도 없었습니다.
오직— 사랑만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직은 이름 붙이지 맙시다.”
잠시 멈추시고 부드럽게 이어가셨습니다.
“지금은 같이 걷는 게 먼저입니다.”
그 순간 백 기자는 알았습니다.
이건 확인의 순간이 아니라,
동행이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도시는 그대로였지만—
세상은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네온사인은 덜 날카로웠고,
사람들의 얼굴은 조금 더 느리게 보였습니다.
그 남자께서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자… 어디부터 가볼까요?”
백 기자는 눈가를 닦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가슴은 여전히 떨렸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 밤
백 기자는 아직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깊은 동행이
지금,
이 도시 한복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1부 5장 교회에서 배우는 침묵
그날 밤,
두 사람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도시는 여전히 밝았지만,
그들의 걸음은 점점 더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네온사인의 빛이 줄어들고,
차 소리가 멀어지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드문드문 끊어지기 시작할 때—
그곳에, 작은 교회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간판의 불빛도 조금은 희미했고,
외벽은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건물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차갑지 않았습니다.
따뜻했습니다.
마치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공간처럼.
그분께서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작게 미소 지으셨습니다.
“여기… 참 좋네요.”
백 기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분을 따라 문을 열었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
찬송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음정,
조금씩 엇나가는 박자,
그러나 그 안에는 진짜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있었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눈물을 닦으며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하나의 파도가 되어 천장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백 기자는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가슴이 막혀왔습니다.
그분께서는 강단 가까이에 서 계셨습니다.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보고 계셨습니다.
기도하는 손들,
떨리는 입술들, 고개 숙인 어깨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그분의 시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들 위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의 눈빛이 조금 더 깊어졌습니다.
마치—
참고 있던 감정이
조용히 올라오는 것처럼.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려고 애쓰고 있었군요…”
그분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습니다.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그 감정은 공기를 타고 전해졌습니다.
그분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교회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습니다.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옷은 낡아 있었고, 얼굴에는 깊은 피로가 묻어 있었습니다.
손에는 작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뒷자리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울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그녀를 바라보셨습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그녀의 옆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더 크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참고 있던 울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제… 너무 힘들어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삶 전체가 담겨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하고…”
“아이 병원비는… 감당이 안 되고…”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녀의 말은 끊어졌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손을 얹고 계셨습니다.
그 손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장 정확한 온도였습니다.
그때—
그녀의 울음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숨이 가라앉고,
어깨의 떨림이 멈추고,
눈물은 계속 흐르는데—
고통의 눈물이 아니라 풀려나는 눈물이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아주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아팠지요.”
그 한마디에—
그녀는 다시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외로움이 풀리는 울음이었습니다.
—
백 기자는 그 장면을 보며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이건 설교가 아닙니다.
이건 두나미스! 기적입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중년의 남자였습니다.
걸음이 불안정했습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분께서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눈을 마주치셨습니다.
그 남자의 눈에는 포기와 두려움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그의 어깨를 잡으셨습니다.
“괜찮습니다.” 그 한마디였습니다.
그 순간—
그 남자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허리가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손에 힘이 들어갔고, 눈빛이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이게… 어떻게…”
그분께서는 그저 웃으셨습니다.
“이제… 조금 덜 아프실 겁니다.”
그 말은 기적보다 더 따뜻했습니다.
—
그날 밤—
그 교회 안에서는
소리 없는 기적들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상처를 내려놓았고,
누군가는 용서를 시작했으며,
누군가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백 기자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 같은 성격이라면
분명 무언가 했을 텐데—
이 순간만큼은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가슴이 꽉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말로 꺼내면 깨질 것 같은 공기.
그래서— 그는 침묵했습니다.
그날 백 기자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큰 소리로만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는 눈빛 하나로도—
한 사람의 인생을 살려내신다는 것을.
그리고 그분께서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사람들 사이에 서 계셨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1부 6장 사찰 침묵 속의 편견
교회를 나와 조금 걸었을 때였습니다
찬송의 여운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었고
눈물의 온기가 완전히 식지 않은 밤이었습니다
그때 그분께서 아주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엔 절에도 가볼까
그 순간 백 기자의 발걸음이 멈추었습니다
몸이 아니라 심장이 먼저 멈춘 것 같았습니다
나는 웃지 않았습니다
농담으로 넘기지도 못했습니다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그 안에 있던 베드로 같은 성격이 숨길 틈도 없이 튀어나왔습니다
왜 하필 거기요
목소리가 낮게 시작되었지만 점점 빨라졌습니다
안 됩니다
거긴 안 돼요
숨이 가빠졌습니다
큰일 납니다
백기자는 말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거기 가시면 주님은 이단 삼단 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봐요
나는 이미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저도요
숨이 흔들렸습니다
솔직히 나도 거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국 가장 깊은 속마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싫어요
안 가요
차라리 제가 죽을지언정 거긴 못 갑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도시는 그대로였지만 공기가 바뀌었습니다
그분께서 백 기자를 바라보셨습니다
그 눈빛에는 실망이 없었습니다
분노도 없었습니다
오직 사랑만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아직 내 사랑이 어디까지 있는지 다 보지 못했구나
그 말에
백 기자의 숨이 멎었습니다
애야
그 부름은 너무 따뜻해서 오히려 더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무안하고 영원한 사랑이다
그 말은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훈계도 아니었습니다
고백이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피를 흘리고
그 고통을 견딘 이유는 그분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습니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한 단어 한 단어 천천히 꺼내셨습니다
죄인이든
원수든
몸을 파는 창녀든
도둑이든
강도든
살인자든
잠시 아주 짧은 침묵
나를 핍박하고 못을 박았던
그 지도자들과 그 백성들까지도
그분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습니다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했다
그 순간 도시의 소음이 멀어졌습니다
백 기자의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분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신이
얼마나 작은 사랑 안에 갇혀 있었는지가 드러났습니다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자비의 하나님이다
그분은 잠시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마치 아주 오래된 기억을 꺼내시는 것처럼
내가 겟세마네에서
핏방울을
물방울처럼 흘리며
울었던 이유는
목소리가 더 낮아졌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자녀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백 기자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물방울 같은 사랑
그 말이 가슴 깊은 곳을 찢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더 이상 설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다시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절의 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향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습니다
백 기자의 몸이 먼저 긴장했습니다
여긴 아니잖아요
그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끝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벗으셨습니다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그 고요한 확신이
오히려 백 기자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분께서 한 걸음 절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순간 공기가 바뀌었습니다
기도 소리도 없었습니다
찬송도 없었습니다
설교도 없었습니다
오직 침묵
벽의 무늬들
닳아버린 나무 기둥
낮게 흔들리는 등불
그 모든 것이 사람의 긴 시간과 지워지지 않은 고통을 그대로 품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불상을 바라보셨습니다
비교하지 않으셨습니다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대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보셨습니다
백 기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릿속에서 수십 번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분노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사람만 보고 살았구나
그분께서는 불상 앞에서 잠시 멈추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머리를 숙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숨을 고르셨습니다
그 순간 백 기자는 느꼈습니다
그분은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픔을 보고 계셨습니다
수행자의 고독
구원을 향한 갈증
자신을 비워야 한다는 압박
그 모든 몸부림을 그분은 조용히 다 안고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작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도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 한마디
백 기자의 무릎이 순간 힘을 잃었습니다
울고 있는 사람들
믿음이 달라서가 아니라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아프고 지쳐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
그분은 처음으로 이곳을 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분께서 돌아서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그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고 조금은 어설퍼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애야! 사랑은 영역을 가리지 않는다
백 기자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곳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기 확신이었습니다
그날 백기자는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선을 긋는 일도 편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을 넘어 함께 아파하는 일이라는 것을
절 안의 침묵은 차갑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따뜻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 와 계셨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백 기자는 그 뒤에 서서 숨을 쉬었습니다
아직 다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동행은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크게 사랑하게 만들기 위한 길이라는 것
그때 절 안쪽에서 한 스님이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나이가 많지 않았습니다
눈빛은 고요했고
목소리는 낮았으며
무언가를 오래 참아온 사람의 표정이었습니다
스님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말씀 하나만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설교는 없었습니다
가르침도 없었습니다
그저 불자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스님이 말했습니다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지쳐 있습니다
누군가 사랑을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분께서 아주 잠시 숨을 고르셨습니다
그리고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괜찮다 그 한마디
허락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약속처럼 들렸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과 마주 서셨습니다
손을 들지 않으셨습니다
형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눈을 마주치셨습니다
그 순간 스님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분께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금까지 버텨온 시간
나는 다 알고 있다
스님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습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그 말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절 안의 공기가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미소 지으셨습니다
사랑은 설명되지 않습니다
전해질 뿐입니다
백 기자는 그 장면을 한 발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팠습니다
왜 아픈지 이제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사랑을 말로만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랑이 사람에게 닿는 순간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백 기자는 처음으로 믿음의 신앙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1부 7장 첫 신앙고백
절을 나오십니다.
문턱을 넘는 순간, 백 기자의 발이 멈춥니다.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지나온 것처럼
안과 밖의 공기가 분명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조금 전까지 그를 붙들고 있던 긴장은
스르르 풀려나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대신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가슴 깊은 곳에 내려앉습니다.
백 기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고개를 숙입니다.
이번에는 더 이상 버티지 않습니다.
이상할 만큼 자연스럽게 입술이 먼저 열립니다.
“미안합니다.”
그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립니다.
그분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히려 더 깊이 그의 마음을 파고듭니다.
백 기자의 목소리가 떨립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이 말은 익숙한 회개의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고백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며 말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숨이 가빠옵니다.
말이 끊어질 것 같지만
멈출 수가 없습니다.
“사랑에도 조건을 붙였습니다.
사람을 나누었습니다.
편을 가르고, 옳고 그름으로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제 편견을 지켜왔습니다.”
눈물이 조용히 떨어집니다.
소리 없이 바닥으로 스며듭니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합니다.
억눌러 두었던 것들이
하나씩 무너져 내립니다.
그분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자리를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그 자리에 함께 서 계십니다.
그 침묵은 외면이 아니라
가장 깊은 동행이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가 이어집니다.
그때, 아주 낮은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제… 보이기 시작했구나.”
그 한마디는 정죄도 아니었고 칭찬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함께 걸어도 된다는 허락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십니다.
백 기자는 그 뒤를 따릅니다.
이번에는 앞서지 않습니다.
막아서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걸어갑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깨닫습니다.
신앙은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것이라는 사실을.
백 기자는 다시 깨닫습니다.
사랑은 지켜내는 신념이 아니라
깨져가며 배우는 길이라는 것을.
그 길은 언제나 아프지만 그래서 더욱 진실합니다.
그리고 그 길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그분께서 서 계십니다.
도망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시며,
함께 걸어주시는 분.
백 기자는 그 뒤를 조용히 따릅니다.
그날 이후로 그의 걸음은 달라집니다.
1부 8장 첫 글 기록
그날 밤, 백 기자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그는 불을 켜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만이
방 안을 희미하게 채웁니다.
그 빛은 마치
오늘 하루의 잔상처럼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백 기자는 천천히 책상 앞에 앉습니다.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용히 펜을 듭니다.
기자로서 수없이 많은 글을 써왔지만 오늘은 손이 떨립니다.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써야 하는지 알면서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 그는 잠시 눈을 감습니다.
오늘 걸었던 길,
그분의 침묵, 그리고 그 한마디.
그 모든 장면이 다시 마음속을 지나갑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첫 문장을 적습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을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을 따라 걸었습니다.”
펜 끝이 잠시 멈춥니다.
숨을 고릅니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이어 씁니다.
“그분께서는 교회에만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절에도 계셨고 거리에도 계셨습니다.”
그는 잠시 멈춥니다.
눈물이 다시 차오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닦지 않습니다.
그대로 두고 계속 써 내려갑니다.
“이 글은 설교가 아닙니다.
비판도 아닙니다.
변증도 아닙니다.
그저… 목격한 것을 기록한 글입니다.”
그의 손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합니다.
이제 문장이 아니라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백 기자의 시선이 자신이 쓴 문장 위에 머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긋는 분이 아니라
그 선을 넘어 사람에게로 오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펜을 잠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거짓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두렵고, 그래서 더 자유롭습니다.
그는 다시 펜을 듭니다.
마지막 문장을 적습니다.
“이 글은 믿음을 설득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 문장을 쓰는 순간,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어떤 무게가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펜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이 동행은 하룻밤의 체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작입니다.
앞으로 써 내려갈 모든 글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날 이후,
백 기자는 글을 쓰기 전에 항상 한 가지를 묻습니다.
이 글이 사람을 가르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에게로 가고 있는가.
그 질문은 언제나 그분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오늘도 조용히 사람에게로 걸어오고 계십니다.
백 기자는 그 뒤를 묵묵히 따릅니다.

2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외출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주 오래전 2000년 전 그 시간처럼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십니다
다시 이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것
다시 사람들 사이를 걷는다는 것
아 긴장 초조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기대가
그분의 안에서 조용히 일어납니다
서른 즈음의 설렘 이미 세상을 아시는 분이시면서도
다시 만날 세상 앞에서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마음입니다
거울 앞에 서십니다
연한 베이지 바바리코트
짙은 남색 슈트
심장처럼 달린 붉은 넥타이
잠시 자신을 바라보시다가
조용히 미소 지으십니다
야 멋있네
그 웃음에는 위엄도 권위도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에게로 가고 싶어 하는 설렘만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빛을 타지 않으시고
구름을 가르지 않으시고
이 도시의 속도로 도시의 바닥을 밟으며 걸어 나오십니다
1장 신호등
그분은 오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신호등 앞 빨간 불이 켜졌습니다
사람들은 멈춥니다
아니 멈춰진 것처럼 서 있습니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건너편으로 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고쳐 끼고
누군가는 오늘 하루를
마음속에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백 기자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머릿속에는 아직 쓰지 못한 기사 하나가 맴돌고 있었습니다
왜 요즘은 사람들 얼굴에 여유가 없지
스스로 던진 질문이 자꾸만 되돌아옵니다
그때였습니다
그분이 신호등 앞에 서셨습니다
베이지 코트 자락이
바람에 아주 살짝 흔들립니다
붉은 넥타이는 단정했지만 어딘가 사람처럼 자연스럽습니다
그분은 신호등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 시선에는 계산이 없습니다
평가도 없습니다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재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옆에 서 있던 한 여성이 갑자기 비틀거립니다
하이힐 굽이 보도블록 사이에 끼었습니다
넘어지는 순간은 늘 짧습니다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무너집니다
그때 그분의 손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끌어당기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넘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지탱해 주는 손이었습니다
세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네가 설 수 있을 만큼만
힘을 주는 손
여성은 놀란 눈으로 그분을 바라봅니다
숨이 잠시 멎은 듯 시간이 느려집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 말은 놀람과 안도 사이에서 조용히 떨어집니다
그분은 미소로 답하십니다
천천히 가세요
그 말에는 조급함이 없습니다
훈계도 없습니다
충고도 없습니다
그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따뜻한 온도만이 있습니다
여성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신호등은 여전히 빨간 불입니다
그런데
백 기자의 가슴이 이상하게 조여 옵니다
왜 저 말이 이렇게
아프게 들릴까
천천히 가세요
누군가 나에게도 그렇게 말해 준 적이 있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들었지만 흘려보냈는지도 모릅니다
백 기자는 그분을 다시 바라봅니다
그분은 이미 여성에게서 시선을 거두셨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다시 사람들을 보고 계십니다
그 순간
또 하나의 질문이 백 기자의 마음을 치고 올라옵니다
왜 저 사람은 생색을 내지 않을까
누군가를 도우면
확인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기억되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그분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신 것처럼 서 계십니다
사람이 넘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뀝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입니다
도시는 다시 속도를 되찾습니다
그분도 그 흐름 속으로 조용히 섞여 들어가십니다
특별할 것 없는 사람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백 기자는 자기도 모르게 그분의 뒤를 따라 걷습니다
걸음이 맞춰집니다
거리도 유지됩니다
이상하게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피어납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사람 사이가 익숙하십니까
그분은 뒤돌아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백 기자는 느낍니다
그 질문이 이미 전달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분의 걸음이 조금도 빨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마치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분처럼
아니
처음부터 함께 걷고 계셨던 분처럼
버스 안, 전철 안에서
그곳은 단순한 이동의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인생이 스쳐 지나가는 작은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누군가는 피곤에 지쳐 눈을 감고 있고,
누군가는 휴대폰 속 세상에 깊이 빠져 있으며,
또 누군가는 창밖을 보며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그 조용한 공간 속에서
들리는 것은 오직 바퀴 소리와 간간이 울리는 안내 방송뿐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의 무게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삶의 흔적들,
웃고 있어도 감춰진 눈물들,
바쁘게 지나가지만 멈추고 싶은 순간들…
버스 안, 전철 안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가장 조용히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그분은 모두를 알고 계시고, 각자의 사연을 듣고 계십니다.
그 좁은 자리에서 잠시 눈을 감고 속으로 말해보십시오.
“주님, 이곳에도 함께 계시지요?”
그 한마디 기도가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 작은 평안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버스 안, 전철 안— 그곳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배 자리입니다.

2장 병실의 공기
그분은 병실에 계셨습니다.
하얀 벽 사이로 번지는 희미한 형광등 불빛,
코끝을 찌르는 알코올 냄새,
끊임없이 울려대는 기계의 소리.
병실은 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밖에서는 분 단위로 세상이 움직이지만,
이 안에서는 초 하나가 길게 늘어져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 놓습니다.
백 기자는 취재를 마치고 조용히 복도를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기사에 들어갈 문장도 이미 정리되어 있었고 인터뷰 내용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열린 병실 문 너머로 그분이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베이지 코트는 벗어 의자 위에 조심히 걸려 있었고
붉은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습니다.
마치 이 공간에서는
조금이라도 숨을 편히 쉬어야 한다는 듯,
그분은 말없이 침대 옆에 서 계셨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설명도 없으셨습니다.
기도하는 자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환자의 이마 위에 손을 얹고 계셨습니다.
백 기자의 머릿속에서 기자의 습관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저건 의료 행위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의식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건 무엇입니까.
기계 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었고
심전도 그래프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환자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깊이 감겨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환자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풀렸습니다.
정말로, 눈으로 보지 않으면 느낄 수조차 없는 작은 변화였습니다.
굳어 있던 입술이 조금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 옆에 서 있던 보호자가 그것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어…” 그 한 음절에서 말이 멈췄습니다.
목이 메인 것입니다.
그분은 손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오래 그 자리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마치 괜찮다는 말을 말이 아니라 체온으로 전하는 분처럼.
그 순간, 백 기자의 가슴이 이상하게 조여 왔습니다.
왜입니까.
왜 저 손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집니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병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습니다.
그때, 보호자가 그분을 바라봅니다.
낯선 사람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보호자가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아는 분이십니까.”
그분은 고개를 저으십니다. “아니요.”
짧은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에는 조금의 거리감도, 서운함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보호자가 다시 묻습니다.
“그럼… 왜…” 그분은 환자의 이마에서 손을 천천히 떼시며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혼자 아니게 하려고요.”
그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약속처럼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미 이루어진 사실처럼 들렸습니다.
그 순간, 보호자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의자에 주저앉듯 앉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저… 저만 자꾸 무너지는 것 같아서요…”
그분은 앞에 서지도 않으셨습니다.
위로하려는 듯 손을 내밀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옆에 서셨습니다.
같은 방향으로,
같은 시선으로 환자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버티고 계십니다.”
그 한마디에 보호자의 눈에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립니다.
참고 있던 시간이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백 기자는 그 장면을 보며속으로 묻습니다.
왜 저분은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까.
왜 “살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으십니까.
그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혹시…
기적은 바로 이 장면이 아닙니까.
기계 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병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조용히 코트를 집어 드시고 병실을 나서십니다.
보호자는 고개를 깊이 숙입니다. 말은 하지 못합니다.
백 기자는 그분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옵니다.
참고 또 참다가 결국 입을 엽니다.
“저기요…”
그분이 걸음을 멈추십니다.
백 기자의 목소리가 조금 떨립니다.
“당신은… 왜 항상 이렇게 계십니까.”
그분은 잠시 생각하시다가
조용히 대답하십니다.
“여기가… 사람 사는 자리라서요.”
그 한마디에
백 기자의 심장이 깊게 울립니다.
그분은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걸음을 옮기십니다.
백 기자는 그 자리에 서서 끝내 적지 못한 문장을 가슴에 쌓아 둡니다.
이것은 기사로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살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3장 기다림이라는 고통
병원 복도에는 사람들이 앉아 계십니다.
앉아 계시지만, 그 누구도 쉬고 계신 분은 없습니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의 호출을,
검사 결과를, 혹은 아무 소식도 없다는 그 사실 자체를…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을 가장 깊이, 가장 조용히 소모시키는 시간입니다.
숨은 쉬고 있지만
마음은 계속 무너지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분은 그 복도 한가운데에 앉아 계셨습니다.
특별한 자리를 고르지 않으셨습니다.
창가도 아니고
출입문 근처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들 사이,
가장 평범한 의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마치…
누구도 알아보지 못해도 괜찮다는 듯이.
백 기자는 복도 끝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분은… 왜 저기에 앉아 계신 걸까…’
그분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신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앞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기도하는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같이 기다리고 계신 분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중년의 여성이
참다 참다 말을 꺼내셨습니다.
“얼마나 기다리셨어요…”
그분은 시계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여성을 바라보셨습니다.
“조금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거짓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접었다 펴고, 또 접었다 펴고…
검사 결과지였습니다. “아들이에요…”
설명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먼저 입을 열어버린 것입니다.
그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아주 무서우시죠…”
그 한마디에 여성의 손이 멈추었습니다.
참고 있던 감정이
그 자리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네.” 그 짧은 대답 하나에
그동안 쌓여 있던 두려움이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판기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냉커피 한 잔을 뽑아
여성에게 건네셨습니다.
“조금 드세요.”
그 말은 단순히 목을 적시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무너지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여성은 컵을 받자마자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저… 제가 엄마잖아요…”
그 말은 책임이었고 죄책감이었고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위로하려고 애쓰지도 않으셨습니다.
설명을 하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옆에 계속 함께 앉아 계셨습니다.
백 기자는 그 장면을 보며 마음속으로 계속 되묻습니다.
‘왜… 왜 저분은 아무 해결책도 주지 않는데
사람이 이렇게 무너지고, 또…
이상하게 다시 붙들리는 걸까…’그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기다림의 고통은 문제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결과가 늦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고통의 진짜 이름은
‘혼자라는 감각’이었습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른다는
그 깊은 고립감.
그것이 사람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 감각을 없애고 계셨습니다.
말로가 아니라
설명으로가 아니라
그저 함께 있음으로.
그날 복도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4장 시장에서 사과를
그분은 시장 한복판에 계셨습니다.
비닐 천막 아래,
과일 상자가 층층이 쌓여 있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거 싱싱해요.”
“오늘 들어온 겁니다.”
“조금만 깎아주세요.”
삶은 여기서도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흥정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사과 상자 앞에 멈추셨습니다.
값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상인의 얼굴부터 보지도 않으셨습니다.
사과 하나를 들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시고 한참을 바라보셨습니다.
잘 익었는지,
색이 고른지,
상처는 없는지…
그 눈길은유난히도 천천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백 기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저렇게 오래 보실까…
사과 하나에 저렇게까지 시간을 쓰실 일이 있을까…’
그분은 상처 난 사과를 아래로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상처 난 쪽을 그대로 위로 두셨습니다.
마치
숨기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백 기자의 가슴이 조금씩 조여오기 시작했습니다.
상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저씨, 그건 좀 흠 있는 건데요.”
그분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셨습니다.
“흠이 있어서 더 잘 보입니다.”
상인의 웃음이 그 말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네?”
그분은 사과를 내려놓지 않으신 채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상처가 있으면 눈이 먼저 가잖아요.”
상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단순히 사과에 대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백 기자는 그 장면을 보며 속으로 묻습니다.
‘왜… 왜 저 말이 사람에게 하는 말처럼 들릴까…’
그분은 사과를 봉지에 담으시며
상인에게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많이 버티셨습니다.”
상인의 손이 봉지를 잡은 채 멈추었습니다.
그분은 덧붙이셨습니다.
“버틴 것이 번 것입니다.”
그 말 앞에서 상인은 고개를 숙였습니다.
울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깊게 숨을 들이쉬었습니다.
그 숨 안에는 하루가 다 들어 있었습니다.
백 기자는 노트를 꺼내 조용히 한 문장을 적었습니다.
‘오늘도 버틴 사람.’
그리고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5장 값을 묻지 않는 이유
상인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숫자는 빠르게 찍히고 있었지만
손놀림은 어딘가 느렸습니다.
그분은 가격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백 기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작게 여쭈었습니다.
“왜 값을 보지 않으십니까…”
그분은 사과 봉지를 들고 계시다가
잠시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값은 이미 다들 알고 있어서요.”
“네…?”
그분은 백 기자를 바라보셨습니다.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다 알고 있습니다.”
백 기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분은 아주 담담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짜리 삶인지요.”
그 순간
백 기자의 심장이 툭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그 말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도 배운 적이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장 정확한 말처럼 들렸습니다.
상인은 계산을 마치고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하나 더 가져가세요.”
그분은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아닙니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이셨습니다.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백 기자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받으셨다는 것일까…’
그분은 사과 봉지를 들고 시장 밖으로 걸어 나가셨습니다.
백 기자는 그 뒤를 따라가며 마음속으로 계속 묻습니다.
‘당신은…
항상 이렇게 사람을 먼저 사시고 물건을 나중에 보시는 겁니까…’
그분은 끝내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백 기자는 가격표를 볼 때마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을 먼저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상하게 불편하면서도
또 이상하게 따뜻했습니다.
6장 현장의 먼지
그분은 현장에 계셨습니다.
철골이 부딪히는 소리와
기계가 토해내는 거친 진동,
공기 속에 뒤섞인 먼지와 땀의 냄새…
이곳에서는 말이 짧아지고 표정이 굳어집니다.
살아내는 것 자체가 일이 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백 기자는 안전모를 쓰고 그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카메라 렌즈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정리되어 보였습니다.
프레임 안에 담기는 순간 현실은 조금 덜 거칠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 프레임 밖에 계셨습니다.
작업자들 사이,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
마치
굳이 드러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조용히 서 계셨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누군가 실수를 했습니다.
자재가 어긋나며 큰 소리가 현장을 울렸습니다.
“야, 조심 좀 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고 작업자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말이 없었습니다.
변명도 없었습니다.
그저 더 작아진 채 서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 사람 곁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채
그 옆에 서 계셨습니다.
작업자의 손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셨습니다.
툭…
세지도 않았고 형식적이지도 않은 손길이었습니다.
마치 그날 하루를 겨우 버텨낸 사람에게
“당신, 여기 있습니다”
그 존재를 확인해 주는
그런 손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작업자의 숨이 순간 흔들렸습니다.
“…괜찮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괜찮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분은 다시 한 번 어깨를 두드리셨습니다.
더 이상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백 기자의 가슴이 이유 없이 답답해졌습니다.
‘왜… 왜 저분은 더 좋은 말도
더 큰 위로도 하지 않으실까…’
그런데 그때 작업자의 눈이 붉어져 있었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헬멧을 고쳐 쓰고 있었습니다.
울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여기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울지 않아도 되는 만큼만 손을 얹으셨습니다.
작업이 끝났습니다.
기계 소리가 멈추고
사람들이 하나둘 손을 씻으러 모였습니다.
세면대 위로 물이 흐르고
검게 물든 물이
하얀 타일 위로 흘러내렸습니다.
손은 그날의 기록이었습니다.
굳은살,
갈라진 피부,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
그분은
작업자 옆에 서서 같이 손을 씻으셨습니다.
닦아드리지도 않으셨고 상처를 만지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같은 물에 같은 손을 담그셨습니다.
백 기자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물었습니다.
‘왜… 왜 저분은 위에 서지 않으실까…’
그때 작업자가 쑥스럽게 웃으며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무슨 일 하시는 분입니까…”
그분은 손을 씻으시며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요?”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오늘은요.”
작업자는 피식 웃다가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마음 어딘가에 깊게 남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만이라도 같이 일해 준 사람.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버틸 힘을 얻습니다.
그분은 손을 닦으신 후
작업자에게 휴지 한 장을 건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손… 다치지 마십시오.”
그 말은
이곳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작업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그 짧은 대답 안에는
말로 다 담지 못한
감사가 담겨 있었습니다.
백 기자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깨끗한 손.
상처 하나 없는 손.
그런데…
문득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내 손은…
오늘 무엇을 했던 것일까…’
그 질문 앞에서
한동안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7장 한 가족의 식탁
그분은 가족의 뒤에 서 계셨습니다.
작은 식탁.
반찬은 몇 개 되지 않지만
말은 자꾸 부딪힙니다.
아버지는 피곤해서 말이 짧아지고
어머니는 답답해서 말이 빨라집니다.
같은 공간에 앉아 있지만
서로를 향하지 않는 시선들.
그리고 그 사이에
아이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있지만
먹는 것보다
눈치를 더 삼키고 있습니다.
그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아이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십니다.
아이의 눈이 먼저 그분을 발견합니다.
“…아저씨?”
그분은 작게 웃으십니다.
그 웃음에는
꾸중도 없고
부담도 없고
설명도 없습니다.
그저 괜찮다는 얼굴입니다.
“응.” 그 한 마디에
아이의 입술이 조금 풀립니다.
그 순간,
부모의 말다툼이 아주 잠시 멈춥니다.
이상한 침묵입니다.
억지로 만든 침묵이 아니라
무언가가 스며들어 말을 멈추게 한 침묵입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아이를 봅니다.
어머니도
아이를 봅니다.
그동안 같은 식탁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얼굴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봅니다.
그분은 그 사이에
아무 말 없이 서 계십니다.
고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누가 잘못했는지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저
이 식탁에 혼자가 없게 하십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아이는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아저씨도 밥 먹었어요?”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응. 같이.”
그 짧은 대답에
아이의 얼굴에 안도 같은 것이 번집니다.
오늘 이 밥은
혼자 먹은 밥이 아니라는
그 작은 확신.
백기자는 그 장면을 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것을 느낍니다.
아…
저래서 가족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구나.
사랑이 많아서가 아니라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잠깐이라도
함께 앉아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물러나십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고
발걸음도 남기지 않으십니다.
아무도 그분이 떠난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런데
식탁 위의 공기가
조금 달라져 있습니다.
말은 여전히 서툴고
삶은 여전히 버겁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같이 먹었습니다.
그게 기적이라면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8장 가난한 이웃 따뜻한 선물
그분은 더 안쪽으로 들어가십니다.
집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름 없는 골목,
낡은 천막,
임시로 이어 붙인 지붕 아래.
비를 겨우 막고
바람은 다 막지 못하는 공간.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기다림에 익숙한 자세로.
손은 무릎 위에 얹혀 있고 눈은 바닥을 향해 있습니다.
누군가는 아이를 안고 있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안고 있지 않습니다.
비어 있는 팔이 더 무겁게 보입니다.
그분은 그들 앞에 서지 않으십니다.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않으십니다.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같은 높이에 서십니다.
그분의 손에는
상자가 들려 있습니다.
번쩍이지 않습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아무 표시도 없습니다.
그저 조용한 선물입니다.
포장을 풀 때도 소리를 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한 사람씩 바라보십니다.
줄을 세우지 않으십니다.
순서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먼저 온 사람도
늦게 온 사람도 없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사람이 먼저 압니다.
아…
내 차례구나.
그분의 손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저 건네십니다.
아이에게도
노인에게도
말 없는 사람에게도
손이 떨려도
그분은 기다리십니다.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괜찮아 보이게 만들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그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누군가의 손에
상자가 놓이는 순간
아주 작은 변화가 시작됩니다.
울음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갑니다.
꽉 쥐고 있던 마음이
조금 풀립니다.
누군가는
상자를 가슴에 안습니다.
누군가는
바로 열지 못합니다.
아직
믿어도 되는지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 망설임까지도 아십니다.
그래서
재촉하지 않으십니다.
백기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장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이건
구호가 아닙니다.
이건
캠페인이 아닙니다.
이건
방문입니다.
그분은
가난을 없애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곁에
혼자가 아니게 하러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각자의 속도로 흩어집니다.
누군가는 천천히
누군가는 급하게
다시
각자의 하루로 돌아갑니다.
그분은
남지 않으십니다.
사진도 찍지 않으십니다.
이름도 남기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떠난 자리에는
선물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남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을
넘길 수 있다는 감각.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기억.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분은
다시 걸어가십니다.
또 다른 골목으로
또 다른 사람에게로
아무 말 없이.
가난한 모든 이에게
그분은 오늘도
선물을 들고 외출 중이십니다.
9장 노숙자의 밤 거리의 기도
그분은 밤으로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시간,
불이 꺼진 거리,
하루의 소리가 다 식은 뒤의 공기 속으로.
가로등 몇 개가 겨우 버티고 있는 골목.
차가운 바닥 위에
사람들이 누워 있습니다.
신문지를 덮고,
박스를 깔고,
몸을 최대한 작게 접은 채.
누군가는 잠든 척을 하고
누군가는 진짜로 지쳐 잠들어 있습니다.
그 사이에
그분이 걸어오십니다.
발소리를 거의 남기지 않으십니다.
누군가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이 깨어 있었던 사람들을
더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한 사람 곁에 멈추십니다.
중년의 남자.
수염은 정리되지 않았고
손은 갈라져 있습니다.
그의 옆에는
빈 소주병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그분은 앉으십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같이 앉으십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잠든 줄 알았던 그 남자가
천천히 눈을 뜹니다.
그리고
그분을 봅니다.
처음에는 경계합니다.
다음에는 의아해합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묻습니다. “…누구십니까.”
그분은 잠시 그를 바라보십니다.
그 시선에는
설명도 없고 증명도 없습니다.
그저 함께 있어 주는 눈빛입니다.
남자의 입술이 떨립니다.
“저… 여기서 자면 안 되는 거 아는데요…”
아무도 묻지 않은 말을
스스로 꺼냅니다.
“조금만… 조금만 쉬다가 가려고 했습니다…”
그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변명도
해명도
그만두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끝까지 듣고 계십니다.
남자의 눈이 점점 젖어듭니다.
“저도… 원래는…”
말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목이 막혀버립니다.
그는 얼굴을 돌립니다.
울음을 숨기려고 합니다.
그분은
조용히 손을 내미십니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추십니다.
허락 없이
붙잡지 않으십니다.
그 남자가
천천히 손을 올립니다.
망설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그분의 손 위에 얹습니다.
그 순간
그의 어깨가
무너집니다.
참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집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막지만
숨이 흔들립니다.
그분은 그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그 밤의 기도입니다.
멀리서 백기자가 그 장면을 봅니다.
그는 기록하지 못합니다.
카메라도 들지 못합니다.
이건
기사가 아니라
누군가의
살아남는 밤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남자는
그대로 잠이 듭니다.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입니다.
그분은
그 자리에 조금 더 앉아 계시다가
천천히 일어나십니다.
덮여 있던 신문지를
조금 더 당겨 주십니다.
바람이 덜 들어오도록.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다음 사람에게로
걸어가십니다.
그 밤의 거리에는
아무도 모르는 기도가
조용히 흐르고 있습니다.
10장 죽음 앞에서의 동행
그분은 가장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이
끝내 머무르기를 두려워하는 자리.
병실보다 더 깊은
마지막의 공간.
불빛은 어둡고
숨소리는 얕습니다.
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몸은 이미 많이 약해졌고
눈은 반쯤 감겨 있습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가족은 지치고 멀어졌고
시간은 조용히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 곁에 다가가십니다.
의자를 끌지 않으십니다.
소리를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저 그 자리 옆에 서 계십니다.
그 사람의 눈이
아주 힘겹게 열립니다.
그리고
그분을 봅니다.
놀라지 않습니다.
묻지도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이제… 끝입니까…”
그 질문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의
외로움도 있습니다.
그분은
그의 손을 잡으십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으십니다.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니요.”
아주 조용한 대답입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그 한 마디에
그 사람의 눈가에
눈물이 맺힙니다.
흘러내릴 힘도 없어서
그저 고여 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아주 작은 고백.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
그분은
그 손을 조금 더 꼭 잡으십니다.
“압니다.” 짧은 대답.
하지만 그 안에는 그가 지나온 모든 밤과
모든 고통과 모든 외로움이 이미 다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숨이 점점 느려집니다.
시간이
마지막을 향해 조용히 흐릅니다.
그분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계십니다.
그 사람의 손이
조금 더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손은
끝까지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숨이
조용히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멈춥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공기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딘가로
이어진 것 같은
조용한 평안이
남습니다.
그분은
그 손을 천천히 내려놓으십니다.
그리고
아주 잠시
그 자리에 머무르십니다.
떠난 것이 아니라
옮겨진 것처럼.
백기자는
문 밖에서 그 시간을 느낍니다.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저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입니다.
눈물이
조용히 떨어집니다.
아…
죽음 앞에서도
혼자가 아니구나.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혼자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다시 걸어가십니다.
다음 사람에게로. 아직 살아 있는 누군가에게로.
3부 회복 – 왕의 보좌
그분은 오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1장 사랑고백, 기도
그분은 마지막으로
사람들 한가운데에 서 계셨습니다.
도시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차는 멈추지 않았고,
신호등은 규칙대로 바뀌었으며,
누군가는 급하게 전화를 받으며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이 서 계신 그 자리만큼은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소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모든 소리가 한 겹 얇아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이 세상이 잠시 숨을 참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을 부르지도 않으셨고
설명을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바닥은 차가웠습니다.
돌바닥은 낮 동안 식지 못한 열기와
밤의 서늘함이 뒤섞여
사람의 몸을 밀어내는 듯한 감촉이었습니다.
그 거친 감촉이
그분의 무릎 아래로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조금도 몸을 흔들지 않으셨습니다.
아프다는 표정도
불편하다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그 무릎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무릎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낮추어 보이기 위한 연출도 아니었습니다.
그 무릎은…
사랑이 견딜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였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해
끝까지 내려가는 자리였습니다.
그분은 두 손을 모으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그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기도는
입술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그 내용을 들을 수 없었지만
모두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기도는
도시의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병실.
하얀 벽과
기계 소리 사이에서
숨을 겨우 붙잡고 있던 사람의
침대 곁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밤새 통증에 뒤척이다가
이제는 울 힘조차 없어
눈만 감고 있던 그 사람의
가슴 깊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살고 싶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 한마디를
그분의 기도가 대신 붙들었습니다.
새벽 편의점.
계산대에 기대어
졸음을 참고 있던 청년의
지친 눈동자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서 있었고
누군가에게 무시당했고
이유도 없이 화를 들었던 그날.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아무도 듣지 못한 그 질문 위에
그분의 기도가 조용히 내려앉았습니다.
고시원 복도.
형광등이 깜빡이며
희미하게 깔린 그 공간.
문 하나 사이로
서로의 삶이 나뉘어 있지만
아무도 서로를 모르는 그 곳.
외로움이 습기처럼
벽에 배어 있는 그 자리에도
그분의 기도가 스며들었습니다.
공사 현장.
먼지와 땀,
짧은 말과 굳은 표정 사이에서
하루를 버텨내던 사람들.
몸은 지쳤지만
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분의 기도는
그들의 굽은 허리를 조용히 감쌌습니다.
그리고
어느 작은 식탁.
말은 많았지만
마음은 닿지 않았던 자리.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상처만 주고받던 가족의 자리에도
그분의 기도는
말보다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 기도는
요청이 아니었습니다.
무언가를 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설득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바꾸려는 의지도 아니었습니다.
그 기도는…
기억이었습니다.
잊혀진 사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시 품어내는 기억.
버려졌다고 생각한 순간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기억.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눈물을
끝까지 기억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백기자는 그 모습을 보며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가까이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가까이 가면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왜…” 입술이 떨렸습니다.
“왜 지금…
왜 이렇게까지…”
그분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습니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이
세상의 모든 무게를
혼자 짊어진 사람의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그분의 몸은 더 낮아졌습니다.
처음에는 무릎이었지만
이제는…
온 존재가
땅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백기자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이 기도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기도가 아니라
끝을 향해 가는 기도라는 것을.
끝.
포기하는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사랑의 끝.
그 순간,
백기자의 눈에서
참고 있던 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만하세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그 말을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떠올렸습니다.
자신이 외면했던 순간들.
모른 척했던 사람들.
도망쳤던 책임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흘렸던
자신의 눈물까지.
그 모든 것 위에
지금
그분이 무릎을 꿇고 계셨습니다.
백기자의 다리가 힘을 잃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으려고 할수록
더 쏟아졌습니다.
“왜 저를 위해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계셨습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이
모든 대답이었습니다.
그날,
도시 한가운데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채
한 분이
세상을 위해 마지막까지 내려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2장 뜨거운 포옹
기도가 끝났을 때
그분은 천천히 일어나셨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곧장 백기자를 향해 걸어오셨습니다
시선이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잠깐 머무르셨습니다
그리고 오래 바라보셨습니다
그 눈빛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신 눈빛이었습니다
그분은 백기자 앞에 서셨습니다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질문도 없으셨습니다
그저 두 팔을 벌리셨습니다
그 순간 백기자의 가슴이 먼저 무너졌습니다
참고 있던 것들이
버티고 있던 것들이
한순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분은 백기자를
아주 뜨겁게 안아주셨습니다
형식적인 포옹이 아니었습니다
위로를 위한 제스처도 아니었습니다
다시는 안지 못할 것처럼
영원히 놓지 않으실 것처럼 그렇게 안으셨습니다
백기자의 얼굴이 그분의 어깨에 깊이 묻혔습니다
그제야 울음이 터졌습니다
참아왔던 시간들이
밀려오듯 쏟아졌습니다
“예수님…” 목소리가 끊어졌습니다
“저… 저는 늘 뒤늦게 알았습니다…”
숨을 고르려 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먼저 보지 못했고
상황만 기록했고 사랑을 말로만 다뤘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이제야…
조금… 조금 보이는데…” 말이 무너졌습니다
“이별은… 너무 빠릅니다…”
그분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백기자의 등을 더 깊이 감싸 안으셨습니다
못자국이 있는 손
그러나 여전히 따뜻한 손
그 손이
더 단단하게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숨이
백기자의 귀 곁에서 아주 조용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숨
사랑의 숨
놓고 싶지 않은 하나님의 숨
그 순간 백기자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포옹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떠남의 인사가 아니라
다시 살아가라는 부르심이라는 것을
그분은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계시고
여전히
상처 난 자를 안고 계시며
여전히
늦게라도 돌아오는 자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두 팔을 벌리고 계신다는 것을

3장 회복 왕의 보좌로
그분은 천천히 백기자를 놓으셨습니다
놓으셨지만
완전히 놓지 않으신 것처럼
그 따뜻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돌아서셨습니다
이번에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낮지도 않았고
크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이름이 불린 것처럼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얘들아…”
그 부름에는 나이가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도
지친 어른도
상처 입은 노인도
모두가 그 부름 안에 있었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 한마디 안에 다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너희를 안다”
그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으로 안으시듯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얼마나 오래 버텨왔는지
얼마나 많이 참았는지
얼마나 자주 혼자였는지…”
잠시 멈추셨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누군가는 울음을 삼켰고 누군가는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나는 다 안다”
그 한마디에 더는 숨길 것이 없었습니다
백기자의 눈물이 다시 쏟아졌습니다
그분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셨습니다
숨을 고르듯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힘들고
지치고
병들고
아파도…”
목이 잠기셨습니다
그분도 잠시 말을 멈추셨습니다
그 아픔을
이미 다 지나오신 분처럼
“…조금만 참으렴”
그 말은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부탁이었습니다
간절한 부탁이었습니다
“다 지나간다”
그분의 얼굴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습니다
눈물 속에서도 평안을 건네는 미소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 부름에
누군가는 주저앉았고 누군가는 두 손을 모았습니다
마지막 당부가 이어졌습니다
“나를 기억해라
그리고 사랑과 덕을 많이 쌓아라”
그 말씀은 삶 전체를 향한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천국에서 기쁘게 맞이하겠다”
그 순간
빛이 그분을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사람들이 손을 뻗었습니다
잡고 싶어서
놓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닿지 않았습니다
백기자가 목이 찢어지듯 외쳤습니다
“예수님… 아시지요…”
숨이 끊어질 듯 흔들렸습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요…”
눈물이 말을 삼켰습니다
“예수님 아시지요 예수님 아시지요…”
그 외침은
기도였고 고백이었고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지요…”
그분은
마지막으로
백기자를 바라보셨습니다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아무 말씀 없이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 눈빛 하나로 모든 것이 전해졌습니다
남아라
기억하는 자로
기록하는 자로
그분은 천천히 오르셨습니다
구름 사이로
빛 속으로
그리고
다시 하나님 우편의 보좌로
도시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하고
일상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전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조용히 울었고
누군가는 가슴을 붙잡았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백기자는 그 자리에 남았습니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노트를 꺼냈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눈물이 떨어져 종이가 번졌습니다
그는 한 문장만을 적었습니다
“그분은
오지 않으신 적이 없다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 문장은 기사가 아니었습니다
증언이었습니다
그는 그 기록을 세상에 남깁니다
누군가 읽고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며
누군가 울고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며
누군가 포기하려던 순간에
붙잡히기를 바라며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이미 그분을 한 번쯤은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지치던 날
아무도 몰래 울던 밤
설명할 수 없는 위로가
가슴을 스쳐 지나간 순간
그때
그분은 거기 계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필로그
하나님의 화려한 외출
이 책을 덮는 순간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그분이 이 도시에 걸어오셨다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채 그 질문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백기자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 역시
확신하지 못했고 증명하려 했고 기록으로 붙잡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보는 것은 눈의 문제가 아니라
머무는 시간의 문제라는 것을
그분은 특별한 날에만 오지 않으셨습니다
큰 사건이 있을 때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하루
지극히 흔한 얼굴들 사이
지극히 사소한 순간 속에
이미 와 계셨습니다
당신이 지하철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날에도
병원 복도에서
이름이 불렸던 순간에도
가족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저녁에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하루를
겨우 버텨낸 그날에도
그분은
당신보다 앞서 걷고 계셨고 당신보다 늦게 떠나셨습니다
혹시
이 책을 읽으시며 유독 오래 남는 장면이 있으셨습니까
도시 한가운데를 걷던 그분
말없이 손을 얹던 병실
상처 난 것을 가리지 않던 시장
같이 손을 씻던 현장
아무 말 없이 안아주시던 마지막 순간
그 장면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면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면
눈물이 먼저 고였다면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기억에 더 가깝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분을 만난 적이 있으십니다
다만
그때는 그 이름을 붙이지 못하셨을 뿐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설득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이 이미 지나온 자리에서
그분의 발자국을 조심스럽게 가리킬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외로웠던 그 순간에도
그분은 당신 곁에 계셨습니다
당신이 무너졌던 그날에도
그분은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보이지 않았을 뿐 멀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책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외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그분은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도시를 걸어가고 계십니다
당신의 옆에서
당신의 하루 안에서
당신의 숨결 가까이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당신께 남기고 싶습니다
그분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눈물 속에
당신의 침묵 속에
당신의 포기하지 않는 하루 속에 이미 살아 계십니다
당신이
누군가의 곁에
말없이 앉아 주는 순간
당신이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를 품어주는 순간
당신이 작은 사랑 하나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순간
그때
하나님의 화려한 외출은 다시 시작됩니다
이번에는 당신을 통해서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은
당신 안에서
당신 옆에서
당신의 주변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함께 걷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화려한 외출은
이미 당신의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