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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한 인류를 향해 내민 신의 전격적인 구속(救贖)의 손길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으로 읽는 현대 사회(20)

절망의 수렁에서 건져내는 은혜라는 이름의 새로운 계약

인간의 공로가 삭제된 자리에 세워진 구속자의 위엄

비참한 실존을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옮기는 반전의 서사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0문

 

Q. 20. Did God leave all mankind to perish in the estate of sin and misery? A. God having, out of his mere good pleasure, from all eternity, elected some to everlasting life, did enter into a covenant of grace, to deliver them out of the estate of sin and misery, and to bring them into an estate of salvation by a Redeemer.
문 20.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죄와 비참의 상태에서 멸망하게 버려두셨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영원 전부터 일부를 영생으로 선택하셨고, 그들을 죄와 비참의 상태에서 건져내어 구속자에 의해 구원의 상태에 이르게 하시려고 은혜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AI 이미지 (제공: 미디어 울림)


인생의 밑바닥에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누군가 위에서 손을 뻗어주기를 갈구한다. 니체의 '위버멘쉬(초인)'가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극복하려 했다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0문은 인간의 자발적 능력이 완전히 파산했음을 전제로 한 '외부로부터의 개입'을 선언한다. 

 

앞선 문항들이 인류의 타락과 비참이라는 어두운 심연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20문은 그 어둠을 가르는 거대한 빛의 서막이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버려두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이다. 이는 인류를 향한 신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구체적인 '계약'의 형태로 나타난 사건이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이 질문은 '운명'과 '섭리(Providence)'의 대결이다. 그리스 비극 속의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 앞에 무력하게 무너진다면, 성경의 인류는 자신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택'이라는 반전을 경험한다. 소요리문답이 말하는 '자신의 선하신 기쁨'은 구원의 근거가 인간의 자격이나 조건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이는 현대의 능력주의 사회에 던지는 충격적인 메시지다. 

 

스펙과 성과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세상에서, 아무런 공로 없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진정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구원은 쟁취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은혜'의 본질이 여기서 드러난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은혜의 언약'은 일종의 '채무 탕감 프로그램'이다. 소요리문답 제12문에서 맺었던 '생명의 언약(행위언약)'이 인간의 순종을 담보로 한 계약이었다면, 인간의 파산으로 인해 그 계약은 실행 불가능해졌다. 이때 하나님은 '은혜의 언약'이라는 새로운 판을 짜신다. 이 계약의 특징은 인간이 지불해야 할 대가를 구속자가 대신 지불하게 한 것이다. 

 

'구속자(Redeemer)'라는 단어는 고대 시장에서 노예의 몸값을 대신 치르고 자유를 사주는 '속량'의 개념을 담고 있다. 인간은 영적 파산 상태에서 스스로를 구출할 비용이 없었으나, 신은 자신의 독생자를 구속자로 세워 인류의 부채를 전액 상환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선택'의 개념은 종종 배타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적 맥락에서 '일부를 선택하셨다'는 진술은 누구를 제외했다는 차별의 선언이 아니라, 그 누구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비참한 상태에서 신이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은혜의 강조점이다. 만약 신이 공의대로만 행하셨다면 인류는 모두 멸망했겠지만, 신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두셨다. 이는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말한 '자기 실현'을 넘어, 타자에 의해 부여된 새로운 정체성으로의 전이다. 우리는 '비참의 자녀'에서 '구원의 상속자'로 신분이 격상된다.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따라 우리를 대우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의 상태에 있을 때, 이미 우리를 영생으로 부르셨다. 이것이 '은혜'가 가진 파괴적인 아름다움이다. 구속자가 계시다는 소식은 인류가 들은 가장 따뜻한 뉴스다. 이제 우리는 나의 실패에 집중하기보다, 그 실패를 덮고도 남는 신의 거대한 계약서에 집중해야 한다.

 

제20문은 우리에게 '소망의 근거'를 묻는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으며 우리를 건져내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신의(信義)'에 있다. 타락한 인류는 에덴에서 쫓겨났으나, 은혜의 언약 안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가족으로 초청받는다. 이 위대한 구출 작전은 이제 '구속자가 누구인가'라는 구체적인 인물론으로 이어진다. 실존의 비참함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현대인에게 제20문은 이렇게 속삭인다.

 

“당신은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 대가를 치르고 사기로 결정한 고귀한 존재다.”

 

 

허동보 목사 | 수현교회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외

 

 

 

작성 2026.02.11 11:50 수정 2026.02.1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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