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이 만들어 주는 느린 시간
설 명절이 되면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함께 음식을 만들고, 오랜만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소소한 놀이로 웃음을 나누는 시간은 바쁜 일상에서는 좀처럼 만들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명절의 순간들은 지나고 나서도 유난히 따뜻하게 마음에 남는다. 이번 설에도 우리 가족은 한자리에 모였다. 식사를 마치고 한숨 돌리던 중, 아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윷놀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오래전 명절의 기억을 다시 꺼내듯 윷판이 펼쳐지고, 말이 놓이는 순간 집 안의 공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웃음으로 시작된 승부의 순간
필자와 아내가 한 팀이 되었고, 부모님께서 한 팀이 되었다.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 필자 옆에 붙어 우리 팀의 일원이 되었다. 윷가락을 손에 쥐는 순간, 단순한 놀이임에도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윷놀이는 웃으며 시작하지만 판이 벌어지면 누구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 묘한 매력이 있다. 게임 초반은 팽팽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말들이 윷판 위를 오갔다. 가족끼리 하는 놀이였지만, 순간순간 올라오는 승부욕은 숨길 수 없었다.
기울어진 흐름과 예상 밖의 반전
시간이 흐르며 흐름은 조금씩 부모님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말 세 개가 우리를 앞서 나갔다. 이대로라면 결과는 어느 정도 보이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마음 한편에서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게임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끝까지 해보기로 했다. 그때 아들이 윷가락을 들고 조심스럽게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윷가락을 확인하는 순간, 집 안에서 동시에 “모!”라는 외침이 터졌다. 분위기가 단숨에 뒤집혔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차례에서도 다시 ‘모’가 나왔다. 아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고, 우리 팀의 흐름도 빠르게 살아났다. 결국 우리는 부모님의 말을 따라잡았고, 극적인 역전에 성공했다.
속도에 대한 오래된 착각
게임이 끝난 뒤 웃음이 한동안 이어졌다. 단순한 가족 놀이였지만, 그 순간 내 마음에는 하나의 생각이 또렷하게 남았다. 인생은 정말 모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는 이미 저만큼 앞서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 속도가 부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윷판 위의 말처럼, 인생의 흐름 역시 마지막까지 가보기 전에는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법이다. 빠른 출발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잠시 뒤처진 흐름이 끝까지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
우리는 지금 누구의 속도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혹시 지금, 다른 사람의 속도와 나의 속도를 자꾸만 비교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미 앞서가는 누군가를 보며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우리의 삶은 윷판처럼 각자 다른 흐름과 변수를 품고 흘러간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칸을 끝까지 밟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속도가 느려 보일지라도, 그 걸음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면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여정 위에 서 있는 것 아닐까.
나만의 속도로 끝까지 가는 힘
이번 윷놀이를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인생의 속도는 단순히 앞섰느냐 뒤처졌느냐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조급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자신의 호흡대로 걸어가는 힘이 결국 흐름을 바꾸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아들이 던진 윷가락 한 번이 게임의 방향을 바꾸었듯, 우리의 삶에도 예상하지 못한 전환점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너무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다만 내 자리에서, 내 속도로, 끝까지 걸어가려 한다. 어쩌면 그 꾸준함의 끝에서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의 순간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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