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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선택을 넘어 공동의 운명이 된 실존적 채무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으로 읽는 현대 사회(16)

한 사람의 결정이 전체의 성적표가 되는 대표성의 원리

언약적 머리라는 개념이 현대 사회에 던지는 질문

연대 책임의 절망 속에서 발견하는 반전의 소망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6문

 

Q. 16. Did all mankind fall in Adam’s first transgression? A. The covenant being made with Adam, not only for himself, but for his posterity; all mankind, descending from him by ordinary generation, sinned in him, and fell with him, in his first transgression.
문 16. 모든 인류는 아담의 첫 범죄 시에 타락하였습니까? 답. 아담과 맺은 언약은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까지 위한 것이었으므로, 보통의 출생법을 통해 아담으로부터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아담의 첫 범죄 시에 그의 안에서 죄를 지었고 그와 함께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 17:26) 

 

AI 이미지 (제공: 미디어 울림)

 

현대 사회의 가장 강력한 신화 중 하나는 '자기 결정권'이다. 우리는 각자가 독립된 섬처럼 존재하며, 자신의 노력과 선택에 의해서만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우리가 결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한다. 경제 위기가 닥치면 개인의 성실함과 상관없이 가계 경제가 무너지고, 조상의 빚이 자손의 신용을 옭아매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6문은 바로 이 지점, 즉 '대표성'과 '연대'라는 다소 불편하면서도 엄중한 원리를 통해 인류의 타락을 설명한다. 아담 한 사람의 실패가 어떻게 수천 년 뒤를 살아가는 우리의 비극이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언약적 머리(Caput foederale)'의 원리는 현대인의 지독한 개인주의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비즈니스나 정치에서의 '대표성'을 떠올려볼 수 있다. 국가 간의 조약에서 전권대사가 서명하면 그 나라의 모든 국민은 그 계약의 효력 아래 놓인다. 개별 국민이 현장에 없었거나 서명에 직접 동참하지 않았더라도, 대표자가 맺은 계약은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결정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단순히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인류라는 거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이자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국가대표로 세우셨다. 아담의 순종은 인류 전체의 승리가 될 수 있었으나, 그의 반역은 인류 전체의 파산 선고가 되었다. 소요리문답이 강조하는 '보통의 출생법(Ordinary generation)'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진술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영적인 부채를 안고 시작했다는 실존적 파산 선언이다.

 

인문학적으로 이는 인간 존재의 '구조적 운명성'을 시사한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의 영속성을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선조로부터 생물학적 정보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질과 성향, 그리고 근원적인 한계를 물려받는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책임'의 문제를 다루며 개별적인 죄는 없을지라도 집단적 책임은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듯이, 인간은 자기가 태어난 시대와 혈통이라는 맥락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아담의 타락은 단순히 도덕적 실수가 전염된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종(種) 자체가 신과의 관계라는 생명줄에서 이탈한 법적, 유전적 결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악한 행동을 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인이라는 결함 있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종교적 통찰은 인간 실존에 대한 가장 깊은 해부학적 진단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아담 안에서의 타락'은 집단 무의식 속에 각인된 근원적인 불안과 결핍으로 해석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낙원 상실의 트라우마'는 우리가 아무리 성공하고 소유해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을 설명해 준다. 우리는 아담의 DNA 속에 새겨진 하나님을 피하고자 하는 회피 기제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과대망상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소요리문답 제16문이 말하는 '그의 안에서 죄를 지었고 그와 함께 타락했다'는 표현은, 우리가 아담의 범죄 현장에 방관자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담이라는 뿌리에 연결된 가지로서 동일한 생명력의 단절을 경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연좌제라는 억울한 굴레가 아니라, 인류가 본래 하나로 연결된 유기적 공동체였다는 거룩한 설계의 반대 급부이다.

 

이 엄혹한 연대 책임의 원리는 역설적으로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 만약 우리가 각자의 죄로 인해 개별적으로 타락했다면, 우리에게는 수억 명의 구원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집단적으로 무너졌기에, 신은 또 다른 '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집단적으로 회복시키실 근거를 마련하셨다. 대표성의 원리가 타락의 통로였다면, 이제는 은혜의 통로가 된 것이다. 로마서 5장이 증언하듯 아담이라는 첫 번째 머리가 가져온 사망의 지배를, 그리스도라는 두 번째 머리가 가져온 생명의 지배로 덮는 '거룩한 전가(Imputation)'의 신비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가 아담의 빚을 상속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의로움 역시 상속받을 수 있다는 논리적 일관성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결국 제16문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내가 내 인생의 전적인 주인이며 모든 성취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만함을 꺾고, 우리가 거대한 인류의 서사 속에 엮여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한다. 우리는 아담이라는 깨어진 거울의 파편들이다. 하지만 이 비참한 연대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인류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타락이라는 비극적인 연대 책임 속에서도 '구원'이라는 영광스러운 연대 희망을 준비해 두셨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에덴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적 생명'이었으며, 이제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대표자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 때문에 왜 내가 고통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현대인에게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때는 공정함을 따지지 않듯, 아담의 유산 또한 우리 존재의 기본 설정값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아담의 실패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를 덮고도 남는 두 번째 아담의 완벽한 성공을 나의 것으로 삼는 지혜다. 연대 책임의 절망은 연대 구원의 영광을 향한 가장 어두운 새벽일 뿐이다.


 

 

허동보 목사 | 수현교회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외

 

 

 

작성 2026.02.09 15:51 수정 2026.02.0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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