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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칼럼] 62화 또 다시 돌아온 300포기의 김장

보통의가치 칼럼, '일상에서 배우다'

그 대화들이 양념 냄새보다 더 진하게 마음에 밴다

고되고 힘들어도 결국 ‘우리 가족의 따뜻한 역사’가 되고 있다

▲ 해마다 이맘때쯤 아무 말 없이 또다시 모인다. 포기란 없다. 김장 300포기만 있을 뿐. [사진=김기천 칼럼니스트]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의식 같은 풍경

김장철은 언제나 비슷한 듯하지만, 해마다 새로운 온도를 남긴다. 올해 역시 외가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300포기. 숫자만 놓고 보면 어마어마하지만, 우리 가족에게 김장은 오래전부터 ‘일’이 아니라 ‘함께 버티고 함께 나누는 시간’에 가까웠다.

 

토요일 아침, 아직 몸도 덜 깨어난 채 막내 이모댁에 도착했다. 배추와 파를 다듬는 손길, 양념 재료를 씻고 썰고 다지는 과정은 시간이 길고 손도 많이 가지만 이상하게도 지루하지 않다. 이모들과 사촌들이 모여 각자 지내온 일상을 나누고, 최근의 고민을 건네고, 또 그 사이사이에 농담이 오가는 그 분위기 덕분이다. 손은 바쁘게 움직이지만 마음은 느긋했다.

 

준비와 쉼 사이, 일상에서는 좀처럼 갖기 어려운 시간

하루의 준비를 마치고 저녁을 먹은 뒤, 사촌형 내외와 넷째 이모, 그리고 여섯 살 아들까지 함께 스크린골프를 치며 한바탕 웃었다. 일상에서는 각자의 삶에 치여 좀처럼 만들기 어려운 시간이기에, 이런 짧은 여유가 특히 소중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본격적인 김장이 시작되었다. 절인 배추를 씻고 물을 빼고, 양념을 한가득 준비해 놓는 그 시간. 몸은 여전히 무거운데 묘하게 마음은 따뜻하다. 가족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풍경은 이미 온기를 띠기 때문이다.

 

김장의 진짜 시작은 ‘한 점의 수육’에서 시작된다

본격적인 버무림에 앞서 빠질 수 없는 의식이 있다. 갓 삶아낸 뜨끈한 수육 한 점을 김장 속 위에 올려 먹는 순간. 여기에 막걸리 한 모금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완벽한 조합이 된다. 힘든 노동을 잊게 만드는 짧은 휴식,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이 김장이라는 긴 여정에 의외로 큰 힘을 준다.

 

이후 배추가 붉게 물들어 갈 때쯤이면 몸은 지쳐가고, 팔은 무거워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단함 위로 가족들의 대화가 한 겹 더해지며 피로는 조금씩 풀린다. 올해 있었던 기쁜 일과 힘든 일, 서로의 사정을 듣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 대화들이 양념 냄새보다 더 진하게 마음에 밴다.

 

“내년엔 진짜 하지 말자.” 그러나 다시 모이게 되는 이유

김장을 마칠 때면 늘 같은 말이 나오곤 한다. “내년엔 진짜 김장 하지 말자.” 하지만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아무 말 없이 또다시 모인다. 힘든 걸 알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우리를 이 자리로 이끈다. 올해가 벌써 함께 김장을 한 지 10년째다. 

 

세월이 이렇게 빠른지도 모르고, 어느새 모두가 자연스럽게 손에 배추를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언제까지 이런 시간을 함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이 시간들은 고되고 힘들어도 결국 ‘우리 가족의 따뜻한 역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마음의 유산

우리 아이들도 이런 풍경을 보며 자연스럽게 배우게 될 것이다. “아, 가족이란 이렇게 서로의 손을 맞잡고 살아가는 것이구나.” 김장이라는 노동이 단순한 노동을 넘어 마음의 유산이 되는 이유다.

 

정말 안 한다고 해도, 아마 또 할 것이다

올해의 김장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함께 밥을 먹고 서로 고생했다며 등을 두드리고, 배추 비닐과 장갑을 정리하는 일상적인 장면들마저 괜스레 따뜻했다.

 

김장은 늘 힘들다. 그러나 그 고단함 속에 사람 냄새가 있고, 세월의 결이 있고, 우리의 이야기가 있다. 아마 내년에도 우리는 또 모일 것이다.
다시 웃고 떠들며, 또 한 해를 함께 버무릴 것이다.

 

✍ ‘보통의가치’ 뉴스는 작은 일상을 기록하여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치를 전하고 있습니다.

작성 2025.12.01 19:07 수정 2025.12.0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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