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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식 칼럼] 박경리의 '불신 시대'와 내로남불 사회

민병식

박경리(1926~2008) 선생이 쓴 ‘불신 시대’는 한국전쟁 9.28 수복 직후의 혼란기를 배경으로 한다. 공간적으로는 1950년대 서울의 모습이다. 이 단편은 1956년 ‘현대문학’ 8월호에 게재되었고 제3회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박종화, 계용묵, 김동리, 황순원 선생이었다고 한다.

 

9.28 수복 전야에 진영의 남편은 폭사했다. 남편은 죽기 전에 경인고속도로에서 본 괴뢰군의 임종 이야기를 했다. 아직도 나이 어린 소년이었더라는 것이다. 그 소년병은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었는데 터져 나온 내장에 피비린내를 맡은 파리 떼들이 아귀처럼 덤벼들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본 행인 한 사람이 노상에 굴러 있는 수박 한 덩이를 돌로 짜개서 그 소년에게 주었더니 채 그것을 먹지도 못하고 숨이 지더라는 것이다. 남편은 마치 자기 죽음의 예고처럼 그런 이야기를 한 후 폭사하고 만 것이다. 

 

전쟁이 끝났다. 진영은 아들 문수의 손을 잡고 황폐한 서울로 돌아왔다. 문수는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집터는 쑥대밭이 되어 축대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문수가 자라서 아홉 살이 된 초여름, 진영은 내장이 터져서 파리가 엉겨 붙은 소년병을 꿈에 보았다. 마치 죽음의 예고처럼 다음 날 문수는 죽어 버린 것이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아이가 앓다가 죽은 것은 아니다. 길에서 넘어지고 병원에서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차라리 진영으로서는 전쟁이 빚어낸 하나의 악몽처럼 차차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의사의 무관심이 아이를 거의 생죽음시킨 것이다. 의사는 중대한 뇌수술을 엑스레이도 찍어보지 않고, 심지어는 약 준비도 없이 시작했던 것이다.

 

한여름 내내 진영은 앓았다. 찬물만 마셔도 배탈이 났다. 눈병이 나고 입이 부르트기 일쑤였다. 소리와 감각과 색채, 이러한 순서로 진영의 신경은 궤도에서 무너져 나갔다. 병원으로 갔지만 일주일 만에 나오고 말았다. 외국제 주사약이 들었던 빈 병들을 팔아버리는 장면을 본 때문이다. Y병원에서는 주사약의 분량을 속였고, S병원에서는 엉터리였다. 그리고 H병원에서는 빈 약병을 팔았던 것이다. 

 

문수의 혼을 빌기 위해 성당을 찾았다. 그러나 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은 자신의 을씨년스런 모습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어설픈 위치인가를 깨닫는다. 또 미사가 끝날 무렵, 잠자리채 같은 것이 가슴 앞으로 오는 것을 본다. 아주머니가 성급하게 돈을 몇 닢 던졌을 때 잠자리채 같은 연금 주머니는 슬그머니 뒷줄로 옮겨 가는 것이었다. 진영은 구경꾼 앞으로 돌아가는 풍각쟁이의 낡은 모자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한 뒤로 진영은 성당에 다니지 않았다. 

 

이번에는 절을 찾았다. 문수의 혼백이 울면서 떠돌아다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성을 드리는 제물이 적다는 핀잔을 듣는다. 진영은 머릿속에 피가 꽉 차 오는 것을 느낀다. 진영은 절에 두었던 문수의 사진과 위폐를 찾아와 불에 태운다. 진영은 연기가 바람에 날려 없어지는 것을 언제까지나 쳐다본다. 

 

박경리 선생은 실제로 전쟁 통에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고 한다. 전후 홀로 살아가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생전에 “나는 슬프고 괴로웠기 때문에 문학을 했으며, 훌륭한 작가가 되느니보다 차라리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보수와 진보라는 실체 없는 편 가르기로 나뉘어 치고받기에 열중하는 지금 1950년대 불신의 시대와 지금이 딱 정신적인 면에서 흡사해 보인다. 서로를 능멸하며 대한민국을 부조리와 불신의 늪에 빠져들게 사람들, 그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권력밖에 보이지 않는다. 청렴하고 깨끗한 세상은 어디 있는가. 무엇이든 내로남불이다. 자신들이 하면 용서가 되고 남이 하면 죽을죄라는 이중 논리가 판치는 세상, 진정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위정자들을 만나고 싶은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민병식]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시인

현) 한국시산책문인협회 회원

2019 강건문화뉴스 올해의 작가상

2020 코스미안뉴스 인문학칼럼 우수상

2022 전국 김삼의당 공모대전 시 부문 장원

2024 제2회 아주경제 보훈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

이메일 : sunguy2007@hanmail.net

 

작성 2025.06.25 11:47 수정 2025.06.2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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