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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배 칼럼] 호박, 나이의 다른 이름

이윤배

지난해 봄날 장터에서 단호박 모종 하나와 맷돌 호박 모종 두 그루를 사 들고 돌아왔다. 손가락만 한 작은 모종을 들여다보며, 그 속에 이미 여름과 가을이 함께 들어 있다는 사실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뒤뜰 텃밭에 모종을 심고 흙을 다독이자, 계절 하나를 땅에 묻어 듯싶어 마음이 든든해졌다. 따뜻한 봄볕 아래 호박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흙은 뿌리를 품고, 뿌리는 줄기를 밀어 올리며, 줄기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생명은 재촉하지 않아도 제 시간표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렇게 이어져 갔다.

 

호박은 원산지로 알려진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에서 전 세계로 퍼졌고,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뒤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 『한정록』에 재배법이 기록된 것을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 가까이에 있었다는 증거다. 동양계, 서양계, 폐포계로 나뉘는 호박의 종류만 보아도 그동안 얼마나 넓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의 얼굴이 제각각이듯 호박도 크고 작고, 둥글고 길며, 쓰임 또한 다양하다.

 

호박은 넝쿨 식물이다. 줄기와 잎에는 잔털이 돋고, 잎은 다섯모꼴 둥근 삼각형을 이룬다. 넝쿨은 주저하지 않고 뻗어 나간다.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방향을 바꿀 뿐, 자라는 일을 절대 멈추지 않는다. 어느 날부터 꽃망울이 맺히더니 별처럼 노란 호박꽃이 피었다. 수꽃은 길고 암꽃은 짧다. 새벽마다 부지런히 피었다가 해가 높아지면 미련 없이 진다. 장미꽃이 화사하고 귀족적이라면 호박꽃은 소박하고 서민적이다. 호박은 밑거름만 챙겨주면 농약 없이도 잘 자라며, 열매도 넉넉히 내어준다. 그 덕에 호박은 오래도록 사람들 곁에 머물러 왔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꽃이 진 자리에 작은 열매가 맺혔다. 완두콩만 한 크기였지만 그 안에는 이미 가을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크고 작음, 모양의 반듯함과 투박함을 따지자면 끝이 없지만,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두 자기 몫의 시간을 향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호박은 10월에서 12월 사이 가장 맛이 좋다. 국이 되고, 전이 되고, 죽이 되고, 때로는 파이로 변신하기도 한다. 『본초강목』에는 “소화기를 돕고 기운을 보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 와서는 항산화, 면역력 강화, 노화 예방까지 다양한 효능이 밝혀졌다. 속은 달고 그 쓰임새는 한없이 넓기만 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호박을 종종 무시하고 폄훼한다. “호박꽃도 꽃이냐.”,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 못생겼다, 투박하다, 급기야는 아무 생각 없이 “늙은 호박”이라 부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같은 폄훼는 전혀 납득할 수 없다. 수박 중에 ‘늙은 수박’이 없듯, 사과 중에도 ‘늙은 사과’는 없다. 그저 잘 익었을 뿐이다. 익음은 쇠퇴가 아니라 충만이다. 호박도 마찬가지다. 잘 익었기에 단맛이 깊고, 오래 버텼기에 속이 단단하며, 시간을 견뎌냈기에 그 자리에 놓였을 뿐이다.

 

‘잘 익었다’라는 말 대신 ‘늙었다’라는 말로 호박을 깔보는 이면에는 나이 든 이들을 대하는 인간들의 불손한 태도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나이 듦을 줄어듦이나 쇠퇴로만 받아들이는 못된 습관이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시간은 닳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들을 채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호박은 둥글고 모나지 않다. 그것만이 아니다. 어린 순을 내어주고, 꽃을 내어주며, 끝내는 커다란 열매까지 아낌없이 내어준다. 그런데도 스스로를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바로 그 겸손함이 호박의 가장 깊은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도 별반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단순히 낡아지는 일이 아니라, 익어 가는 과정이다. 실패와 후회를 거름 삼아 속을 채우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품으며 점점 더 깊어지는 일, 그렇게 나이 들면서 삶은 완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늙은 호박’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대신 ‘잘 익은 호박’, 혹은 ‘완숙한 호박’이라 불러야 옳다.

 

호박에 담긴 철학은 단순한 음식이나 식물의 이야기를 넘어, 생명과 삶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일깨워준다. 인간 역시 호박처럼 내면의 깊이를 키워가며 완숙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모두 각자의 속도로 익어 가는 호박들일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에는 만사 제쳐 놓고 가족들과 함께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잘 익은 호박으로 호박죽을 끓여, 그 안에 담긴 철학을 음미하고 싶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이윤배]

(현)조선대 AI·SW 학부 명예교수

조선대학교 정보과학대학 학장

국무총리 청소년위원회 자문위원 

호주 태즈메이니아대학교 초청 교수

한국정보처리학회 부회장 

이메일 : ybl7736@naver.com

 

작성 2026.05.05 10:23 수정 2026.05.0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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