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 동화 - 12편 네가 나를 따르겠느냐?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운동장 한쪽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조금 남아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뒤, 도윤이는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신발 끝으로 땅을 툭, 툭 건드렸다.
며칠 전 일이었다.
선생님이 숙제를 확인하던 시간, 짝꿍 민호가 공책을 집에 두고 왔다는 걸 알게 됐다. 옆에 있던 아이들은 민호를 가리켰고, 선생님은 숙제를 하지 않은 줄 알고 민호를 혼냈다.
도윤이는 그 자리에 있었다. 민호가 숙제를 안 한 것이 아니라, 공책만 두고 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괜히 나섰다가 자기도 함께 혼날 것 같았다.
잠깐이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민호는 말이 줄었다. 점심시간에도 혼자 밥을 먹었다. 교실에서 눈이 마주칠 때면 먼저 시선을 거두는 쪽은 늘 도윤이었다.
말했어야 했을까.
그 생각이 며칠째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작은 일이었다고 넘기기에는, 마음속에 남는 것이 자꾸만 커졌다.
그때 체육 선생님이 운동장을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도윤이구나. 무슨 생각 중이야?”
도윤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민호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 자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일, 알고도 모른 척했던 일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다 말하고 나니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말했어야 했죠?”
선생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벤치 옆에 앉아 한동안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지나가며 눈 가장자리를 조금씩 허물고 있었다.
“나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 스무 해도 더 됐지.”
도윤이가 고개를 들었다.
“동료 한 사람이 억울하게 혼나는 걸 본 적이 있었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는데도, 그때 나는 말을 못 했어.”
“어떻게 됐어요?”
“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를 떠났어. 나는 오래 그 일이 마음에 걸렸지.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도윤이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선생님도 그런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면서도, 오히려 마음을 더 무겁게 눌렀다.
실수는 지나가도, 말하지 않은 순간은 오래 남는다는 것을 처음 알 것 같았다.
선생님이 물었다.
“도윤아,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도윤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했다.
“성경에 이런 장면이 있어. 예수가 부활한 뒤 베드로를 찾아가거든.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사람이야. 그런데 예수는 따지거나 화내지 않았어. 대신 이렇게 말했지.”
선생님의 목소리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나를 따르라.”
도윤이가 물었다.
“따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저 뒤를 따라 걷는다는 뜻만은 아니야. 선택의 순간마다 어느 길을 고를 것인가를 묻는 말에 더 가까워. 편한 쪽이 아니라, 옳은 쪽을 고르겠느냐는 거지. 손해 볼 수도 있고, 괜히 불편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길을 택하겠느냐는 뜻이야.”
도윤이는 그 말을 들으며 민호를 떠올렸다.
점심시간마다 혼자 밥을 먹던 민호.
그리고 그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고개를 돌리던 자기 자신도 함께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겨울 햇빛이 골목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도윤이는 천천히 걸으며 선생님의 말을 되풀이했다.
네가 나를 따르겠느냐.
그 말은 무섭지 않았다.
혼내는 말도 아니었고, 억지로 끌고 가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히 선택을 묻는 말처럼 들렸다.
베드로도 선택해야 했고, 도윤이도 선택해야 했다.
그 선택은 대단한 날에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도 왔다.
말 한마디 할 수 있을 때,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있을 때, 편한 쪽과 옳은 쪽이 나뉘는 바로 그 작은 순간마다 다시 찾아왔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도윤이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민호를 찾았다.
민호는 창가 자리에서 공책을 펴 놓고 있었다.
도윤이는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갔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어쩌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며칠을 더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민호야.”
민호가 고개를 들었다.
“왜?”
도윤이는 잠시 숨을 삼켰다.
“그날, 네가 숙제를 안 한 게 아니라 공책을 두고 온 거, 나 알고 있었어.”
민호의 눈빛이 가만히 멈췄다.
“근데 말 못 했어. 겁났어.”
교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주변의 소리도 멀어진 것 같았다.
도윤이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멈췄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미 그 문장 안에 다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민호는 잠시 도윤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공책으로 눈을 내렸다.
그게 다였다.
금세 화해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분위기가 갑자기 밝아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진짜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도윤이가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고 있을 때, 민호가 옆자리 의자를 발끝으로 조금 밀었다.
앉으라는 뜻인지, 우연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도윤이는 잠시 멈췄다가 그 자리에 앉았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조용히 오갔다.
하지만 도윤이는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이전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아주 조금이지만,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수업이 끝난 뒤, 도윤이는 운동장을 지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가늘게 비치고 있었다.
‘네가 나를 따르겠느냐.’
도윤이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씩요.”
그 대답이면 충분했다.
한 번에 다 되는 것도 아니고, 한 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순간마다 다시 묻고, 다시 대답하는 일.
넘어졌던 자리에서 다시 선택하는 일.
따른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도윤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이면 충분했다.
아니, 어쩌면 믿음이란 처음부터 그렇게 자라는 것인지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