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죄를 알면서도 넘겨진 예수
요한복음 18장 39절부터 19장 16절까지의 장면은 단순한 재판 기록이 아니다. 이는 정의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인간사의 축소판이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풀어주지 않았다.
이 사건은 법과 정의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권력은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할 수 있고, 군중은 진실보다 감정을 선택할 수 있다. 그 결과, 무죄한 자가 처형되는 비극이 현실이 된다.
이 본문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선택의 순간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반복해서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는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따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정치적 부담 때문이다. 유대 지도자들과 군중의 압박은 점점 거세졌고, 그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타협을 선택했다. 정의보다 안정, 진실보다 권력이 우선된 순간이다.
이 장면은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조직과 사회 속에서 옳은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선택이 얼마나 큰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준다. 빌라도의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용기의 부재였다.
군중은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를 거부했다. 바라바는 반란자였고 폭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반면 예수는 죄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은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고 외쳤다. 이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집단 심리의 폭발이었다. 개인이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도, 군중 속에서는 쉽게 이루어진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진실보다 자극, 정의보다 감정이 앞설 때, 잘못된 선택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오늘날 SNS와 여론의 흐름 속에서도 이 장면은 그대로 반복된다. 다수가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본문은 강하게 드러낸다.
예수는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은 채 조롱을 받는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찬양이 아닌 비웃음이었다.
이 장면은 인간의 잔혹성이 얼마나 쉽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준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약자를 조롱했고, 폭력은 오락이 되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정당한 과정’처럼 포장되었다는 점이다. 법적 절차 속에서 이루어진 폭력은 더 이상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부당한 상황을 보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는 거의 변명하지 않았다.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음에도 침묵을 선택했다. 이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의도된 선택이었다.
그의 침묵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순종이었고, 구원을 향한 길이었다. 인간의 불의가 극대화되는 순간, 하나님의 계획은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 장면은 역설을 보여준다. 인간의 악이 극에 달할수록, 하나님의 선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침묵은 때로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예수의 침묵은 단순한 말 없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루는 선언이었다.
요한복음 18장 39절–19장 16절은 인간의 선택이 만들어낸 비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속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빌라도는 침묵했고, 군중은 외쳤으며, 예수는 견뎠다. 이 세 가지 태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침묵인가,
아니면 고통 속에서도 진리를 지키는 선택인가.
이 본문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