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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피티 아티스트 이혜임 작가의 ‘자유분방한 예술 유랑’

-현무암의 구멍, 제주의 바람… 스프레이로 숨을 쉬다


[더인사이트뉴스 박주환 기자] 그라피티(Graffiti)는 라틴어 ‘graphium(쓰다, 그리다)’에서 유래한 용어로, 공공장소에 스프레이 페인트나 마커를 이용해 그림을 남기는 예술 형식을 말한다. 과거에는 단순한 ‘낙서’나 ‘반항의 상징’으로 치부되기도 했으나, 현대에 와서는 도시 풍경을 바꾸는 강력한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의 한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본래 그라피티는 도시의 전유물이었다. 매끈한 콘크리트 빌딩과 어두운 지하철역, 누군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골목길의 뒷면이 주 무대였다. 하지만 이혜임 작가는 이 해묵은 공식을 깨고 카메라와 스프레이 캔을 든 채 제주로 향했다. 그에게 제주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입체적인 ‘오픈 스튜디오’다.


‘파괴’가 아닌 ‘발견’… 장소의 숨결을 시각화하다

이혜임 작가의 작업은 ‘파괴’가 아닌 ‘발견’에서 시작된다. 그라피티를 공공 기물 훼손 행위로 규정짓던 과거의 시선은 그의 작품 앞에서 힘을 잃는다. 이 작가는 제주의 버려진 감귤 창고, 해안가의 거친 현무암, 시간이 멈춘 듯한 폐교의 벽면을 찾아다닌다. 그곳에 입혀지는 색채는 장소의 역사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공간이 가진 고유의 숨결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는 촉매제가 된다.


“제주에서의 작업은 나를 비워내는 과정이다. 도시에서는 내가 무엇을 보여줄지 고민했다면, 이곳에서는 제주의 자연이 나에게 무엇을 그리라고 명령하는지에 집중하게 된다”


그의 화풍은 제주 입성 이후 눈에 띄게 자유로워졌다. 정교하게 설계된 스텐실 작업보다는 스프레이의 압력과 바람의 방향에 몸을 맡기는 ‘프리핸드(Free-hand)’ 스타일이 주를 이룬다. 이는 규격화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하나의 시각적 해방 선언과도 같다.


자연과 인공의 충돌, 바람이 완성하는 미학

이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돋보이는 지점은 ‘소재의 수용’이다. 그는 캔버스라는 평면적 제약에 갇히지 않는다. 제주의 상징인 현무암은 그 자체로 완벽한 조형물이자 파트너다. 바위의 불규칙한 굴곡을 따라 선을 긋고, 구멍 사이로 페인트 입자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유도한다. 이때 발생하는 자연의 거친 질감과 매끄러운 인공 색채의 시각적 마찰은 관객에게 묘한 미적 쾌감을 선사한다. 이는 단순한 덧칠이 아니라, 태고의 시간을 간직한 자연 위에 작가의 찰나적 영감을 결합하여 독특한 시각 언어를 완성하는 과정이다.


그라피티 아티스트에게 바람은 대개 방해꾼이지만, 이혜임 작가에게 제주의 거센 바람은 ‘공동 작업자’다. 스프레이를 분사하는 찰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흩어지는 페인트 안개(Mist)는 작품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바람이 강한 날 해안가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는데, 이는 예술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겸손한 예술관의 투영이다. 자연의 섭리에 작품의 일부를 내어주는 행위는, 통제된 도심의 그라피티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유휴 공간에 불어넣는 ‘예술적 심폐소생술’

그의 시선은 소외된 공간으로도 향한다. 농사가 중단되어 비어버린 감귤 창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폐교, 문을 닫은 공장들은 그의 손길을 거쳐 가장 ‘힙(Hip)’한 예술 거점으로 재탄생한다. 낡은 벽면에 새겨진 화려한 레터링과 추상적인 그래픽은 단순히 보기 좋은 그림을 넘어, 죽어가는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예술적 심폐소생술’과 같다.


이 작가의 행보는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에만 머물지 않는다. 제주의 자연과 일상을 기록하는 기록자이자, 거리 예술의 가치를 격상시키는 기획자이기도 하다. 그는 미술관에 박제된 예술의 문턱을 낮추고 대중과 낮은 곳에서 호흡하며 지역 재생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벽’을 찾아다닐 생각이다. 그 벽이 물리적인 벽일 수도 있고,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편견의 벽일 수도 있겠지만, 내 예술이 그 벽을 조금이라도 허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길 위에서 쓰는 예술의 미래, 편견의 벽을 넘어서

이혜임 작가는 이제 제주를 넘어 세계라는 더 큰 캔버스를 꿈꾼다. 하지만 그의 발끝은 여전히 제주의 붉은 흙을 딛고 있으며, 시선은 늘 낮은 곳을 향해 있다. 가장 자유로운 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는 그의 예술적 여정은 이제 막 절정에 다다르고 있다. 우리는 그의 다음 ‘낙서’가 어디에 새겨질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곳이 어디든, 이혜임의 색깔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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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3.26 13:26 수정 2026.03.2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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