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커리어를 이야기할 때 흔히 직업부터 떠올린다. 어떤 일을 하는지, 어느 조직에 속해 있는지, 어떤 경력과 자격을 갖고 있는지가 한 사람의 커리어를 설명하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에는 이력서에 적히지 않는 시간도 있다.
오랫동안 좋아한 음악, 꾸준히 읽어온 책, 주말마다 찍은 사진, 틈날 때마다 그린 그림처럼 당장 직업이 되거나 돈이 되지는 않지만 좀처럼 놓지 못하는 것들이다. 처음에는 그저 좋아서 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쌓이면 어느 순간 그것은 그 사람을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이상조의 음악 에세이 『어쩌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를 읽으며 눈길이 머문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좋아한다는 것은 시간을 내어주는 일
『어쩌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이상조가 신문에 ‘이상조의 음악 이야기’라는 주제로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음악 에세이다. 저자는 KBS라디오, CJB라디오, 충북교통방송 등에서 음악 코너를 진행하고 지역 신문에 음악에 관한 글을 꾸준히 써왔다. 책에는 음악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를 보여주는 문장이 있다.
“음악을 듣는 시간을 절약해서 더 중요한 일에 쓰고 싶지는 않다.”
이 문장을 읽다가 잠시 멈췄다. 우리는 늘 더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하고, 자격증을 취득하고, 성과를 만들고, 미래를 준비한다. 그러다 보면 좋아하는 일은 종종 ‘시간이 남으면 하는 것’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삶을 채우는 것이 반드시 생산성과 효율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음악을 듣는 시간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생각하는 시간이고, 자신의 취향과 세계를 만들어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좋아한다는 것은 결국 그 대상에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일이다.
오래 좋아한 것은 결국 나를 설명한다
이상조에게 음악은 단순히 듣는 취미에 머물지 않았다. 음악을 듣고, 이야기하고, 방송에서 소개하고, 글을 썼다. 그렇게 반복해온 시간이 쌓여 한 권의 음악 에세이로 이어졌다. 여기까지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커리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좋아하는 것을 오래 좋아한다는 것도 한 사람의 커리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커리어를 ‘쓸모 있는 것들의 축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자격증을 따고, 경력을 만들고, 성과를 내고, 자신의 전문성을 높이는 일 말이다. 물론 그것도 커리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 사람의 시간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음악을 오래 듣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한 분야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그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을 만나고, 경험이 연결되고, 어느 순간 자신만의 영역이 되기도 한다. 처음부터 ‘이것을 내 커리어로 만들어야겠다’고 계획하지 않았어도 말이다. 오히려 어떤 경험은 지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된다. 당시에는 점처럼 흩어져 있던 경험들이 어느 순간 연결되고, 그제야 ‘내가 이런 것을 오래 좋아해왔구나’ 하고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의 커리어를 돌아볼 때 직업과 경력만 살펴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무엇을 오래 좋아했는가.
무엇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속했는가.
시간이 지나도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답 속에도 나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숨어 있을 수 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좋아하는 것을 이어가는 사람들
이 책에는 또 하나 눈길이 가는 지점이 있다. 이상조의 음악 이야기 곁에 서양화가 서영란의 그림이 함께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음악을 듣고 이야기하며 글로 남기는 사람과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사람.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두 사람의 작업에는 닮은 점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오래 이어왔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시간이 한 권의 책 안에서 만났다는 점도 흥미롭다.
커리어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언제나 거창한 목표를 먼저 정하고 그곳을 향해 가는 것만은 아니다. 지금은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관심과 경험도 계속 쌓이다 보면 다른 경험과 만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를 덮으며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보다 다른 질문을 해보고 싶어졌다.
당신이 오래 좋아해온 것은 무엇입니까?
아직 직업이 아니어도 좋다. 돈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하게 되는 일이 있다면 그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주 묻는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그런데 가끔은 반대로 지나온 시간을 바라봐도 좋겠다. 내가 오래 좋아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무엇에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었는지, 무엇만큼은 쉽게 놓지 않았는지를. 좋아서 계속해온 일, 자꾸 돌아가게 되는 관심, 오랫동안 놓지 못한 것들. 『어쩌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를 읽으며 나는 꿈의 이름보다 한 사람이 오래 좋아해온 것의 힘을 생각했다. 어쩌면 아직 이름 붙이지 않았을 뿐, 그것 역시 이미 나의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서 정보]
『어쩌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 이상조 · 그림 서영란
출판사 직지 | 2023년 5월 15일 출간
정가 12,000원 | ISBN 9791188841257
교보문고·예스24·알라딘 등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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