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사가 말하는 진실, 왜 외면하나 <그 3>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 서술
우리 사서 가운데 삼국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지대하다.
삼국유사가 삼국사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중요한 史實(사실)을 전한다고는 하지만,
삼국사가 없었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문명국이었다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삼국사는 그 書名(서명)조차
일본인들의 三人成虎(삼인성호) 계략에 밀려 ‘삼국사기’가 되었고[관련기사],
오늘에 이르도록 復名(복명)하지 못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왜 떠받들리는가
일연스님은 삼국유사 紀異(기이)편 머리글에서 스스로 이렇게 밝혔다.
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 在所不語
대체로 옛 성인은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 괴력난신은 공자의 가르침을 적은 ‘論語(논어)’ ‘述而(술이)’ 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상한 이야기를 전하게 된 데 대한, 저자 자신의 변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책을 우리나라에서는 중학교 필독서로 정해 놓았다.
삼국유사를 해설하거나 설화를 그림으로 옮긴 책,
특히 아동용 서적은 범람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랄 만큼 쏟아져 나와 있다.
오래된 일이지만 어느 주간지는 삼국유사를 ‘국학의 꽃’이라 찬양하기까지 하였다.
이쯤 되면 맹목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삼국사는 밀려나고 삼국유사는 떠받들리는 이 역전은 쉽게 납득되지 않지만,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그 근거로 드는 말은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삼국사가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사관으로 집필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삼국유사가 민족의 뿌리인 고조선과 단군신화를 기록하여
역사적 자긍심을 증명하였을 뿐 아니라
공식 역사서에서 배제된 풍부한 문화·민중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는 평가도 있다.
단군신화를 기록하여 민족의 정통성을 확보하였고,
삼국의 범위를 넘어 고조선·부여·가야·발해에까지
우리 고대사의 시간과 공간을 크게 넓혔다는 것이다.
급기야 최남선은 1927년 잡지 《계명》 제18호 《삼국유사》 특집호에서,
삼국사와 삼국유사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서슴지 않고 삼국유사를 꼽겠다고 하였다.
과연 그럴까.
삼국유사는 ‘古記(고기)’를 인용하면서,
환웅이 곰에서 사람이 된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설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후손인 우리를 곰의 자손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웅장하다기보다 오히려 초라한 신화가 되어 버렸다.
단군이 몇 차례 도읍을 옮기다가 숨어 살면서 산신이 되었는데
그 나이가 1908세였다는 대목도 현실감이 떨어진다.
우화로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정작 훨씬 중요해 보이는 역사는 전하지 못하고 있어 답답하다.
일연스님이 인용한 고기의 원래 내용은 이제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곰의 자손이라는 초라한 신화보다는,
삼천이라는 무리의 이동, 태백산이라는 지명,
신시라는 국명(?),
풍백·우사·운사라는 조직,
그리고 360여 사(事)라는 율법 체계를 언급한 사실이
훨씬 귀중한 역사 기록이라고 필자는 평가한다.
여기에 더하여 호족과의 갈등이 어떻게 해소되었는지,
지도자가 된 그 단군이 몇 대에 걸쳐 몇 분이나 계셨는지까지 기술되었더라면
사서로서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목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삼국사의 정체성
이에 대비하여 삼국사의 정체성을 확인해 보자.
삼국사는 당시 임금인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 외에 열 명의 편찬자가 협업하여 지은 책이다.
김부식 한 개인의 감정 이입이나 독단적 판단이 개입할 수 있는 편찬 구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인종은 ‘삼국사’를 지으라고 명하였지,
통사를 지으라고 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전 시대를 아주 외면한 것도 아니어서,
인용할 필요가 있으면 나름대로 기록하였다.
직접 조상인 북부여·동부여와 관련된 기사,
삼한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그것이다.
삼국사가 없다면 우리는 삼국의 역사를 무엇으로 알 수 있겠는가.
이 물음을 한 번이라도 던져 본 사람이라면
삼국사의 가치는 평가할 수조차 없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삼국 가운데서도 고구리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런데 삼국사 없이 고구리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수와 당의 침략전쟁의 실상을, 그 전말을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었겠는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안시성의 처절한 승리를
삼국사 말고 어느 책이 전해 주던가.
일본서기가 아무리 많은 내용을 전한다 하더라도,
왜가 백제를 도와 나라를 부흥시키려 한 전쟁의 국면을 조금이라도 그려 낼 수 있었겠는가.
나아가 삼국사는 우리가 흔히 단군조선이라 부르는 시대 이전의 일도 필요하면 서술하였다.
삼국유사는 환웅을 언급하되 단군을 낳게 하는 역할 이상은 담지 못하였다.
앞서 말한 대로 삼천 무리의 이동,
태백산, 신시,
풍백·우사·운사,
360여 사가 더 귀중한 기록이라고 필자는 보지만,
그나마도 지극히 간소한 정보에 그친다.
삼국사는 단대사의 체재상 환웅과 단군을 위한 별도의 자리를 둘 수 없었다.
사서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에게
삼국유사가 환인시대에서 환웅시대로 이어지는 과정을 일부나마 남겨 놓았다는 사실은,
그래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필자도 이 점은 인정한다.
다만 삼국사 역시 체재의 제약 속에서도
환웅 시대와 맞닿는 역사적 사실을 곳곳에 기술해 놓았음에도
그 사실이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소호금천과 고신을 기록하면 사대주의인가
읽는 이의 인식 수준에 따라 달리 보이겠지만,
삼국사는 삼국시대라는 한 시대를 기록한 단대사이면서도
고구리·백제·신라를 조선 이전 시대를 계승한 나라로 기술하고 있다.
백제본기를 끝내고 본기 전체를 마무리하는 찬자의 論(논)이 바로 그것이다.
新羅古事云 “天降金樻 故姓金氏.” 其言可恠而不可信 臣修史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然而又聞 新羅人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髙句麗亦以髙辛氏之後 姓髙氏. 古史曰, “百濟與髙句麗, 同出扶餘.”
신라 고사에 이르기를, “하늘이 금궤를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괴상해서 믿을 수 없다. 그러나 臣(신)이 사서를 편찬하려고 보니 그 전승이 오래되었으므로 그 문장을 뺄 수가 없다. 그런데 또 들으니,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했고, 고구리 또한 고신씨의 후예이기에 성이 고씨이다.”라고 하였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백제는 고구리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찬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김씨가 되었다는 말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도,
전승의 무게를 존중하여 그대로 실었다.
그러면서 김씨들 자신의 말을 빌려 소호금천씨가 그 조상임을 밝혔고,
고구리는 고신씨의 후예이므로 고씨가 되었음을 알렸으며,
백제는 고구리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여 두 나라의 뿌리가 같음을 분명히 하였다.
삼국유사는 신화의 구조로 서술한 탓에
환웅과 단군의 시대를 역사시대로 규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반면 삼국사는 김부식 자신이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삼국의 조상으로 소호금천씨와 고신씨를 기술함으로써,
지나의 사서들과 교차 검증하면
조선 이전에 또 하나의 역사시대가 존재하였음을 밝힐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무슨 말인가.
소호금천씨와 고신씨가 동이라는 것은 역사연구자들 사이에서 지극한 상식이다.
우리 또한 동이이니,
그 두 분이 우리의 조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에는 산동성에 살았던 사람들만을 ‘동이’로 한정하고
하북성을 비롯한 다른 동쪽 지역의 사람들은 동이가 아니라는 주장이 대두되기도 하였으나,
사서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더욱이 『맹자』 離婁章句(이루장구) 下는
순을 ‘동이 사람(東夷之人)’이라고 못 박았다.
순이 동이라면,
오제의 계보에서 그와 한 줄기로 묶이는
소호금천씨와 제곡고신씨만을 동이 밖으로 밀어낼 근거는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적었을 뿐인데,
소호금천씨와 고신씨를 운운하였다 하여 사대주의가 될 수는 없다.

삼국이 前前(전전) 국가를 계승하였다는 삼국사
전전 국가를 계승하였다는 또 다른 기술은
고구리본기 동명성왕 2년조에 있다.
비류국왕 송양이 항복해 오자
그 땅을 多勿都(다물도)로 삼고 송양을 그 임금으로 봉하면서,
다물이라는 어휘를 풀이한 대목이다.
즉 옛 땅을 되찾는 일을 고구리 말로는 다물이라 한다고 명시하였다.
그런데 불과 한 해 전에 나라를 세운 사람에게 되찾을 옛 땅이 있을 리 없다.
그 옛 땅이 북부여를 가리키는지,
조선이나 신시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삼국사만 보더라도
북부여는 그다지 크고 강한 나라가 아닌 데다
임금도 몇 대에 그쳤으니 북부여는 아닐 듯하다.
한편 나라이름을 고구리라 하였고
그것이 고신씨의 후예였기 때문이라 하였으니,
고씨를 빼면 ‘구리’가 남는다.
이로 보아 조선시대에 앞서 있던 구리를 이은 것으로 추정된다.
곧 구리를 이으면서 고씨의 나라이므로 고구리로 국명을 삼은 듯하다.
그렇다면 이 ‘구리’라는 나라 이름은 어디에서 확인되는가.
지나 사서 여러 곳에 등장한다.
이른 문헌으로는 後漢(후한)시대 徐幹(서간)이 지었다는 中論(중론),
王符(왕부)의 潛夫論(잠부론),
그리고 史記(사기) 등이 있으나,
구리가 덕을 어지럽혔다는 정도에 그쳐 정보가 되지 못한다.
지나의 포털인 百度(바이두)는 구리를 상고시대(5~6,000년 전)에 치우가 이끌었던 부족연맹으로 설명한다.
지나에는 5~6천 년 전에 존재한 국가를 입증할 근거가 없으니,
황제와 탁록에서 싸웠다는 기록만을 근거로 그 연대를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기』 오제본기 황제 편에
而蚩尤最為暴 莫能伐(그러나 치우는 가장 포악했기 때문에 정벌할 수 없었다)는 구절이 나오고,
그 注(주)에 구리와 치우의 정체가 드러난다.
[集解] 應劭曰 蚩尤 古天子. 응소가 이르기를, 치우는 옛 천자다.
[正義] 孔安國曰 九黎君號蚩尤 是也. 공안국이 이르기를, 구리 임금의 호가 치우다.
이어서 보면, 치우라는 천자가 이끄는 나라가 곧 구리인 것이다.
한편 조선 중종 때 찬수관을 지냈다는 이맥이 남긴 태백일사 가운데 신시본기에 따르면,
치우천왕은 철기시대를 열어젖힌 인물로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희귀서적에 대한 수거령이 네 차례 내려졌다.
그 가운데 세조 3년 5월의 유시는 이러하다.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 大辯說 朝代記 周南逸士記 誌公記 表訓三聖密記 安含老元董仲三聖記 道證記 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山ㆍ王居仁ㆍ薛業等三人記錄 修撰企所一百餘卷 動天錄 磨蝨錄 通天錄 壺中錄 地華錄 道詵漢都讖記 等文書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以自願書冊回賜 其廣諭公私及寺社.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주남일사기·지공기·표훈삼성밀기·‘안함로 원동중 삼성기’·도증기·지이성모하사량훈·‘문태산ㆍ왕거인ㆍ설업 등 삼인기록’·‘수찬기소 일백여 권’·동천록·마슬록·통천록·호중록·지화록·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개인의 처소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자가 있으면 바치도록 허가하고 자신이 원하는 서책으로 바꾸어 줄 것이니, 이를 관청과 민간 및 寺社(절이나 사원)에 널리 알리라.
위 목록에 들어 있는 원동중의 삼성기가 지금 전해지고 있다.
그 끝에 神市歷代記(신시역대기)가 붙어 있어 열여덟 분의 환웅 명단을 기록하였는데,
그 가운데 14세가 慈烏支桓雄(자오지환웅)이며
안함로의 삼성기는 이분을 치우천왕이라 하였다.
그 연대가 서기전 2600~2700년으로 추정되므로,
상고시대라는 百度(바이두)의 서술과 정확히 맞물리지는 않더라도
구리가 조선에 앞선 시대였다는 점만큼은 분명해진다.
잠깐만 살펴도 ‘구리’가 얼마나 위대한 나라인지 알 수 있다.
지면 관계로 더 언급할 수 없으나,
신라와 백제 또한 구리를 잇고 있음은 당연하다.
지나의 국가들이 이를 시샘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 위대한 나라와 고구리를 이어 주는 사서가 바로 삼국사이니,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김부식이 (단군)조선시대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기피하며
삼국사를 편찬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도 있다.
조선이 삼국의 땅 위에 세워져 있었음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국사의 첫머리인 신라본기 서두에서
신라의 백성을 ‘조선의 유민’이라 하여
신라가 朝鮮(조선)을 이은 나라임을 명시하였다.
고구리본기 끝부분의 논찬에서는 ‘현토와 낙랑이 본시 조선 땅’이라 하였고,
지리지에서는 “(낙랑군이) 유주에 속하였는데
옛날에는 조선국이었다.”라는 사실을 적어 두기도 하였다.
맺으며
필자 외에도 수많은 비전공 역사연구자들이
지나 사서의 동이전을 비롯하여
남들이 쉽게 찾지 못하는 문헌을 이용하여
사학 전공자들의 통설을 조금씩 뒤집고 있다.
그러나 삼국 역사의 줄거리를 기록한 삼국사가 없다면,
우리 역사의 허리를 이루는 그 시대를 재현할 길이 없다.
삼국사에 약점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본기(本紀)’라는 어휘를 사용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대주의자가 편찬한 사서라는 비하는 철회되어야 마땅하다.
아니,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뿐 아니라
통설로 무너진 우리 역사를 복원하는 데 중추적 역할로 활용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