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1년 9월 23일, 그리스 펠로폰네소스(모레아) 반도의 행정 중심지 트리폴리차(현 트리폴리)가 무너졌다. 그리스 독립전쟁 봉기군이 성안으로 들어간 뒤 사흘 동안 무슬림 주민과 유대인 공동체가 대규모로 학살당했다. 205년이 지난 2026년 9월, 튀르키예 방송 CNN 튀르크에 출연한 한 그리스 학자는 그날을 두고 "주민 거의 전부가 칼날 아래 쓰러졌다"고 증언했다.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같은 날을 서로 다르게 기억한다. 한쪽은 해방을 기념하고, 다른 쪽은 희생자를 추모한다. 이 기억의 간극은 아직 좁혀지지 않았다.
굶주림으로 조여 간 다섯 달의 포위
1821년 봄,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맞선 그리스 봉기가 펠로폰네소스에서 시작됐다. 봉기군 지도자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는 반도의 심장부인 트리폴리차를 무너뜨리면 오스만 측이 쉽게 회복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그해 4월 포위가 시작되면서 보급로가 끊겼다. 성안의 주민들은 굶주림과 역병에 시달렸고, 거리에는 미처 묻지 못한 시신이 쌓여 갔다.
성문이 열리고 이어진 사흘간의 학살
9월 23일 아침, 봉기군의 한 무리가 경비가 허술한 나프플리오 성문 쪽 성벽을 넘어 성문을 열었다. 도시는 그날 함락됐고 곧바로 무차별 살육이 시작됐다. 희생자 수는 서구와 그리스 쪽 사료에서 대략 6천 명에서 1만 5천 명 사이로 추산된다. 튀르키예 학계는 이보다 훨씬 큰 규모로 본다. 콜로코트로니스는 회고록에 자신의 말이 성벽에서 관저에 이르기까지 땅을 한 번도 밟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만큼 시신이 길을 덮고 있었다는 뜻이다.
205년 만에 가해자 쪽에서 나온 증언
튀르키예 역사학회(TTK) 전 회장 위크셀 외즈겐은 이 사건을 이후 발칸에서 수십 년간 이어진 인종청소의 첫 사례로 규정한다. 올해 CNN 튀르크 화면에 등장한 그리스 학자의 증언은 이런 튀르키예 쪽 주장과는 다른 무게를 지닌다. 같은 날 트리폴리 시내에서는 도시의 '해방'을 기리는 예배와 행진, 민속춤 행사가 열린다.
기억의 화해는 인정에서 시작된다
역사는 승자의 기념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한 민족의 독립에는 이웃의 피가 스며 있었다. 그 사실을 가해자 공동체 안의 목소리가 말하기 시작할 때 두 나라의 기억이 처음으로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다. 205년 전 무너진 성벽 앞에서 필요한 건 부정도 과장도 아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용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