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거나 돌봄이 필요해졌다고 해서 반드시 오랫동안 살아온 동네를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 시장과 병원까지 안전하게 이동하고, 운전을 그만둔 뒤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필요한 돌봄과 건강관리를 가까운 곳에서 받을 수 있다면 익숙한 지역에서 생활을 이어갈 가능성은 커진다. 올해 국내에서 법적 근거를 갖춘 고령친화도시 지정제도가 시행되면서 이러한 생활환경을 지방자치단체의 정책과 연결하는 기반도 마련됐다.

2026년부터 법적 근거 갖춘 ‘고령친화도시’
고령친화도시는 노인복지관이나 요양시설을 많이 설치하는 정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인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계속 생활할 수 있도록 이동과 주거, 안전, 건강, 돌봄, 사회참여를 아우르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초점을 둔다.
국내에서는 2026년 1월 24일부터 노인복지법에 고령친화도시의 법적 근거가 시행됐다. 노인복지법 제4조의3은 지역정책과 발전과정에 노인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노인의 역량 강화와 돌봄·안전, 건강하고 활력 있는 노후생활이 구현되도록 정책을 운영하는 지역을 고령친화도시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 장관이 일정한 기준을 갖춘 특별자치시·특별자치도와 시·군·구를 고령친화도시로 지정할 수 있는 제도도 마련됐다. 시행령에는 추진 조직과 인력뿐 아니라 노인의 지역정책 참여와 역량 강화, 돌봄과 안전, 건강하고 활력 있는 노후생활 관련 사업 실적과 조성계획 등이 지정 기준으로 제시돼 있다.
지정받는 것으로 절차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국내 고령친화도시 지정의 유효기간은 5년이며, 지정된 지방자치단체는 조성계획의 이행 상황을 매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보고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 구조를 보면 고령친화도시는 특정 시설 하나를 설치하는 사업이라기보다 지역에서 살아가는 노인의 생활조건을 여러 정책 분야에서 함께 살펴보는 개념에 가깝다.
집 앞 보도에서 버스·주택까지…고령친화성은 일상에서 드러난다
고령친화도시가 실제 생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는 거창한 시설보다 집 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살펴볼 수 있다.
젊을 때는 쉽게 지나갔던 높은 보도 턱이나 긴 횡단보도, 가파른 계단이 나이가 들면서 이동을 어렵게 할 수 있다. 반대로 보행로가 안전하고 중간에 앉아서 쉴 곳이 있으며 화장실과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면 혼자 외출할 수 있는 생활 범위도 유지하기 쉬워진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고령친화도시와 지역사회를 설명하면서 안전하고 접근하기 쉬운 도로와 교통, 장벽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건물과 주택, 공공장소의 좌석과 위생시설 등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특히 이동은 다른 일상생활과 연결된다. 자동차 운전을 중단하더라도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 시장과 병원, 복지관 등을 오갈 수 있어야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보행과 대중교통이 불편해 외출 자체가 어려워지면 의료기관이나 생활시설 이용뿐 아니라 이웃과의 교류와 사회활동에도 제약이 생길 수 있다.
주거환경도 마찬가지다. ‘살던 곳에서 나이 든다’는 말에는 익숙한 동네뿐 아니라 가능한 한 자신의 생활공간을 유지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현관과 욕실의 높은 턱이나 미끄러운 바닥, 가파른 계단처럼 이전에는 대수롭지 않았던 주거구조가 노년기에는 일상생활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어 주택의 접근성과 안전성도 함께 살펴야 한다.
몸이 불편해진 뒤에도 살던 지역에서 생활하려면
고령친화도시를 주거와 교통시설 개선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나이가 들수록 의료·요양·돌봄 같은 서비스와 생활환경의 관계가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올해 전국 시행에 들어간 지역사회 통합돌봄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6년 3월 27일부터 관련 법령이 시행되면서 노쇠·장애·질병 등으로 일상생활 유지가 어렵고 복합적인 지원이 필요한 노인과 장애인 등이 살던 지역에서 의료·요양·돌봄 서비스를 연계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고령친화도시와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같은 제도는 아니다. 고령친화도시는 노인의 참여와 역량, 돌봄·안전, 건강하고 활력 있는 생활 등을 고려해 지역환경과 정책을 조성하는 제도이고,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살던 곳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의료·요양·돌봄 등을 통합적으로 연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두 정책이 지향하는 생활 현장에는 접점이 있다. 집과 도로가 아무리 편리해도 몸이 불편해졌을 때 필요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면 지역에서 계속 생활하기 어렵고, 반대로 돌봄서비스가 있어도 집 밖으로 안전하게 이동하거나 사회생활을 이어갈 환경이 부족하다면 생활의 선택 폭은 좁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2023년 노인실태조사 인용 자료에서는 노인의 87.2%가 살던 곳에서 계속 거주하기를 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이 악화되더라도 살던 곳에서 계속 거주하기를 희망한다는 응답도 48.9%였다.
이 수치는 모든 노인이 어떤 상황에서도 현재 집에서 생활하기를 원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상당수 노인이 익숙한 생활권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주거와 이동, 의료·요양·돌봄을 따로 떼어 보기보다 실제 생활을 중심으로 연결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가는 것도 중요
나이 들어 살던 동네에 계속 거주한다는 것을 단순히 ‘집에 오래 머무는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장을 보고 산책을 하고 친구를 만나거나 문화·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처럼 지역사회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노후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
WHO 역시 고령친화적인 환경을 물리적 시설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노인이 지역사회의 사회·경제·문화생활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도 중요하게 다룬다.
국내 법률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노인복지법은 고령친화도시를 규정하면서 지역정책과 발전과정에 대한 노인의 능동적인 참여와 역량 강화를 명시하고 있다.
이는 노인을 복지서비스의 수혜자로만 보는 접근과 차이가 있다. 지역에 사는 시니어가 어떤 횡단보도가 불편한지, 어느 버스정류장에 의자가 필요한지,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은지 직접 의견을 내고 정책 과정에 참여하는 것까지 고령친화적 환경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WHO 고령친화도시 국제네트워크에 참여해 온 서울에서도 노인 당사자의 정책 참여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서울은 2013년 6월 국내 도시 가운데 처음으로 WHO 고령친화도시 및 지역사회 글로벌 네트워크(GNAFCC)에 가입했다. WHO는 서울시가 2012년부터 운영해 온 ‘어르신정책모니터링단(Senior Policy Monitoring Groups)’을 고령자의 정책 참여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모니터링단은 서울의 고령친화 정책과 생활환경을 살펴보고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책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활동을 해왔다.
일하고 배우고 참여할 기회도 노후생활의 한 부분
고령친화정책을 의료와 돌봄에만 집중하면 비교적 건강하고 활동적인 시니어의 생활은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은퇴 뒤에도 자신의 경험을 활용해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자원봉사나 평생교육, 문화·여가 활동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지역에서 이러한 활동에 접근할 수 있는지 역시 고령친화성을 판단할 때 고려할 요소다.
국내 고령친화도시 지정 기준에서 노인의 역량 강화와 건강하고 활력 있는 노후생활을 함께 다루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결국 고령친화적인 지역은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지원하는 동시에 건강한 시니어가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고 사회적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환경도 갖춰야 한다.
이는 고령친화도시가 ‘노인만을 위한 도시’를 만든다는 의미와도 다르다. 보행환경을 개선하고 건물의 접근성을 높이며 안전한 대중교통 환경을 만드는 일은 노인뿐 아니라 장애인과 어린이, 유아차를 이용하는 가족 등 다양한 주민의 이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WHO 역시 고령친화도시와 지역사회를 다양한 연령과 능력을 포용하는 생활환경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WHO 가입 도시’와 ‘정부 지정 도시’는 구분해야
올해 국내 지정제도가 시행되면서 기사나 정책자료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부분도 생겼다.
그동안 국내에서 사용해 온 ‘고령친화도시’라는 표현에는 WHO의 ‘고령친화도시 및 지역사회 글로벌 네트워크’에 참여한 지방자치단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을 비롯해 국내 여러 지방정부가 이 네트워크에 참여해 왔다.
그러나 WHO 국제네트워크 참여와 2026년부터 시행된 국내 노인복지법에 따른 보건복지부의 고령친화도시 지정은 서로 다른 제도다.
WHO는 자체적인 국제네트워크를 운영하는 반면 국내 지정제도는 노인복지법과 시행령에 따라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방자치단체를 지정한다. 국내 지정은 5년의 유효기간을 두고 있으며 조성계획의 이행 상황을 매년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특정 지방자치단체를 ‘고령친화도시’라고 소개할 때는 WHO 네트워크 가입을 의미하는지, 국내 법률에 따른 정부 지정을 의미하는지 확인해 독자가 혼동하지 않도록 구분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지정 명칭보다 ‘계속 살 수 있는 동네인가’
고령친화도시 정책의 성과는 결국 시니어의 일상에서 확인돼야 한다.
집을 나서 시장과 병원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지,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아도 이동할 수 있는지, 몸이 불편해졌을 때 필요한 의료·요양·돌봄 서비스를 가까운 지역에서 연계받을 수 있는지, 사람들과 만나고 일하거나 배우면서 사회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2026년은 국내 고령친화도시 지정제도가 시행되고 지역사회 통합돌봄도 전국 시행에 들어가면서 ‘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반이 구체화된 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만 법과 제도가 마련됐다는 사실을 곧바로 주민의 삶이 개선됐다는 성과로 연결해서는 안 된다. 지방자치단체가 계획을 실제 사업으로 어떻게 옮기는지, 그 결과 이동·주거·돌봄·안전·건강·사회참여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지속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결국 고령친화도시를 평가하는 질문은 복잡하지 않다. ‘나이가 들고 몸이 예전 같지 않아도 내가 살아온 이 동네에서 일상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가’다. 고령친화도시의 실질적인 가치는 그 질문에 지역사회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