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나안 정복 과정을 살펴보십시오. 원래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땅은 요단강 서편에 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 동편에 있는 암몬과 모압 족속 땅도 일부 차지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막아서며 공격해 왔습니다. 어쩔 수 없는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그렇게 요단강 동편에 수두룩한 목초지가 생겼습니다. 그러자 르우벤 지파를 비롯한 일부가 그 땅을 나눠 갖겠다며 나섭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은 분배받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대신 정복 전쟁에는 누구보다 앞장서겠다고 다짐합니다. 나머지 지파가 생각해 보니 분배받을 땅이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피차 약속하고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됩니다.
여호수아가 이끈 가나안 정복 과정을 보십시오. 강력한 두 지파, 곧 유다와 에브라임 지파가 먼저 정복에 나섭니다. 두 지파 경계가 확장되자 나머지는 제비뽑기로 지역을 할당합니다. 1차 정복 과정이 끝나자 비로소 레위 지파를 위해 재분배합니다. 각 지파가 정복한 성읍 중 일부를 떼어주는 일입니다. 도피성 여섯을 포함해 모두 48개 성읍이 할당됩니다. 제사장에게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서 13개 성읍이 할당되었습니다. 그러니 나머지 35개 성읍은 모두 북이스라엘 땅에 있습니다.

도피성은 요단강 동과 서에 세 곳씩 지정됩니다(수 20:7-9). 이는 요단강 동편이 의외로 땅이 넓었음을 암시합니다. 도피성이 구분되자 레위 지파가 성읍을 요구합니다. 레위 지파가 분배받은 성읍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그나마 가족 단위로밖에는 살 수 없음을 봅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골고루 흩어졌습니다. 자, 문제는 각 지파에게 분배된 땅은 항구적으로 해당 지파에 귀속합니다. 희년이란 제도를 곱씹어 보십시오(레 25:10). 희년은 되돌려주는, 원위치가 기본개념입니다. 종으로 팔렸어도 희년이 되면 자유를 얻게 됩니다. 환원과 원상복구가 희년에 담긴 하나님 뜻입니다. 따라서 부동산도 원래 지파에게로 소유가 되돌려집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서는 지파별 경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처음 나눈 경계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관통합니다. 그 시작이 다름 아닌 가나안 정복입니다. 그리고 증인은 여호수아와 제사장 엘르아살입니다(수 19:51). 자, 그런데 레위 지파를 보십시오. 레위 지파는 전국에 골고루 분산 배치되었습니다. 레위 지파만이 이스라엘 중에 흩어진 채로 가나안 시대가 열립니다. 알고 보니 이는 야곱이 아들들에게 했던 예언 기도 결과였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
야곱이 아람에서 돌아와 세겜에 거주할 때입니다. 그곳에서 야곱 딸 디나가 강제추행을 당합니다. 이에 분노한 아들들이 잔꾀로 세겜 사람들을 살해합니다. 그 결과 주변 족속들이 야곱 가족을 위험인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으라 말씀하십니다(창 35:1). 그렇게 하나님이 보호하신 은혜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을 앞장서서 이끌었던 이가 시므온과 레위였습니다. 문제는 그 두려웠던 기억을 잊지 않고 예언에 담았다는 점입니다. 돌아보면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 각지로 흩어짐은 그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니 여느 지파와 달리 결속력은 거의 강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랬던 레위 지파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됩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1차 이동은 레위 지파 예상대로 처참한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다윗은 실패 원인을 분석하며 레위 지파와 모종의 약속을 맺습니다. 다윗은 실직 위기에 빠진 레위 지파를 위해 새 직업을 제안합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니 레위 지파는 원칙적으로 세속과 연관된 직업은 어렵습니다. 물론 다윗이 제안한 새 직업군은 성전 관련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행정관료와 재판관은 그 위치가 애매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속과 연관성은 더욱 확연해집니다. 아무튼 다윗은 새 직업군을 발굴했고 레위 지파 지지를 받았습니다.
언약궤가 예루살렘 임시막사에 놓이자 레위 지파는 분주해집니다. 행정관료와 재판관을 제외한 레위 지파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성막이 있는 기브온입니까, 아니면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입니까? 그나마 성전 관리자와 문지기는 두 곳으로 나눠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성가대는 어디에 서서 찬송해야 합니까? 그런데 다윗은 단호하게 법궤 앞에서 찬송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니 지성소에 있어야 할 법궤인데, 그 앞에서 찬송해야 합니다. 그래서 훗날 선지자 아모스는 "다윗 같은 것들"이라 예언합니다(암 6:5). 또한 찬송으로 가득한 요한계시록에는 다윗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어린양과 모세의 노래가 진짜 찬송으로 나옵니다(계 15:3).
아무튼 레위 지파는 성막 시대와 달리 갑자기 분주해졌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성막을 핑계로 쉴 수가 없습니다. 언약궤 앞에서 찬송하는데 어떻게 쉴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다윗과 청중이 성가대 찬송을 듣고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피나는 연습만이 살길입니다. 문제는 성가대만 아닙니다. 성전 관리자도 문지기도 바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레위 지파 사람들 움직임을 되돌아보십시오. 그들은 다른 지파와 달리 전국에 흩어져 있습니다. 생활 근거지는 전국에 제각각 흩어져 있는데 생업 현장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은 아예 그들에게 할당되지 않은 생소한 땅 아닙니까? 그러니 그들은 생존을 위해 집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옵니다. 아니, 올라와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기러기 아빠, 혹은 주말부부 원조 격이 된 셈입니다.
레위 사람들 생활 근거지는 예루살렘으로 출퇴근할 위치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에서는 나그네처럼 살아야 합니다. 생업 현장인데 생활 터전은 없으니 몸과 마음이 따로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었는지는 별개로 칩시다. 그들은 과연 언제까지 이런 이중생활 같은 삶을 살았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