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팬데믹은 우리 교육에 묵직한 질문들을 남겼다. 그중 하나는 학교가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우리는 학교를 흔히 지식을 가르치는 기관으로만 이해해 왔다. 그러나 학교는 본래 서로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아이들이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관계를 맺으며, 타인과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팬데믹의 교훈을 비웃기라도 하듯, 교육은 다시 '첨단'이라는 이름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다. AI 맞춤형 학습이 마치 교육의 새로운 해법이라도 되는 양, 교육 현장이 온통 AI 일색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교육은 반드시 공동의 경험이어야 하는가. 아니, 질문을 뒤집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공동이 떠맡아야 할 몫을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조용히 떠넘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도 '시대의 흐름'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명분을 앞세워서.
지난 6월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종단연구에는 9만여 명을 3년간 추적한 코로나 세대의 문해력 진단이 담겨 있었다. 가정 형편에 따른, 우연한 등락이 아닌 '유의한 차이'였다. 똑같은 비대면 수업을 들어도 아이들의 결과는 갈렸다. 집에서 학습을 도와줄 어른이 있는지, 조용히 집중할 공간이 있는지, 끼니를 챙겨줄 이가 있는지에 따라 결과는 판이했다. 학교가 지금껏 애써 완화해 왔던 그 차이가, 장치가 사라진 자리에서 날것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학교는 교과 내용을 전달하는 기관이기 이전에, 서로 다른 출발선의 아이들을 한 공간에 모아 삶의 조건이 만드는 차이를 잠시 유예하는 사회적 장이다. 교실이라는 공간, 교사와 또래라는 타자, 일상의 규칙과 리듬은 학생을 특정한 관계망 속에 위치시키며, 그 안에서 비로소 학습을 가능하게 한다. 팬데믹은 바로 이 장치를 해체했다.
상식선에서 본다면 교육당국은 이 결과로부터 대면교육의 회복을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끌어냈어야 했다. 그런데 교육 정책은 '학생이 화면 앞에 혼자 앉는' 똑같은 구조를, 이번에는 'AI 맞춤형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격차 해소의 해법인 양 홍보한다.
'맞춤'이라는 말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그 전제—학생들은 이미 모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학습 주체라는 가정—를 이들은 한 번이라도 따져 보기는 했을까. 우리는 이미 팬데믹을 통해 확인하지 않았던가. 주체성 자체가 사회적·관계적 조건 위에서만 형성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학습을 끌고 갈 힘이 있고 집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아이에게 AI는 유용한 도구가 되겠지만, 그런 조건이 결핍된 아이에게 이것이 무슨 교육이 되겠는가. '맞춤'이라는 이름의 기만은, 가장 도움이 필요한 아이를 가장 먼저 지워버린다.
지금껏 교육계에 횡행한 기술 낙관주의는 교육을 풀어야 할 '문제'로 인식하게 했다. 데이터를 쌓고 알고리즘을 정교하게 다듬으면 학습 격차를 줄일 수 있다는 믿음은, 그래서 교육을 측정 가능한 변수들의 조합으로 환원한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의 핵심도 본질도 아니다. 교육의 본질은 단순한 측정이나 문제상황 해결에만 있지 않다. 타인과의 마주침 속에서 형성되는 자존감, 갈등을 조율하는 능력, 실패를 견디는 감각은 어떤 알고리즘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이번 보고서가 확인한 격차는 교과 역량에만 그치지 않았다. 아이들의 정서와 사회성, 신체 건강 전반에 걸쳐 차이가 확연했다. 친구와 부대끼며 갈등을 다루는 법,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법, 불안을 견디고 다스리는 법, 이런 것들은 시험지로 측정할 수 없지만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힘이며, 화면 너머의 알고리즘이 아니라 마주 앉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란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논란이 되고있는 현장학습이 교육적 의미보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는 질문에 포획되어 있다는 사실은 뼈아프지 않을 수 없다. 교사들이 현장체험학습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가 법적 책임 부담, 민원 스트레스, 과도한 행정 업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의 해결 역시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구조적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
내가 보기엔, AI 맞춤학습과 현장학습의 위기는 마치 거울처럼 마주해 있다. 전자가 '학습의 개인화'라면, 후자는 '책임의 개인화'다. 전자가 배움의 성패를 개별 학생에게 돌린다면, 후자는 사고의 책임을 개별 교사에게 돌리는 식이다. 공동이 떠맡아야 할 몫을 개인에게 떠넘긴다는 점에서, 둘은 같은 사건의 두 얼굴이다.
우리 교육현장은, 아이들이 홀로 컴퓨터 화면 앞을 지키거나 교실 안에 함께 있지만 스스로 고립되어 있는 풍경이 전부다. 공교육이 이러하다 보니, 제한된 교육 재정과 행정력이 AI 인프라에 쏠릴수록 교육의 관계적 토대를 강화할 투자—학급당 학생 수 감축, 교사 확충, 돌봄과 안전을 떠받칠 공적 장치—는 뒤로 밀려난다. 교육부는 학령 인구 감소를 이유로 교원 정원을 줄이고 과밀학급을 방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AI로 개인별 맞춤 교육을 실현하겠다고 떠들어댄다. 맞춤 교육의 핵심 토대인 교사를 떨궈내면서, 그 빈자리를 기술로 메우겠다는 발상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현실은 단순히 특정 교육정책의 실패를 넘어, 우리 시대 교육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새삼 상기시킨다.
지금의 교육 위기는 새로운 기술의 부재에 있지 않다. 한 번도 온전히 실현된 적은 없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교육의 본질에 대해 다시 숙고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기술도, 더 철저한 안전 매뉴얼도 아니다. 교육 철학의 부재, 그러니 도구를 들이기 전에 교육철학에 대해 한번이라도 제대로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교육을 신자유주의의 마지막 식민지로 내어주지 않도록 국민적 차원에서 공감대를 형성해야한다. AI 맞춤학습이 매혹적인 까닭은 그것이 시대정신이 가리키는 경쟁의 언어와 완벽하게 포개지기 때문이다. 각자도생, 자기 책임, 효율과 측정, 그러나 학교는 그러한 언어에 포획되어선 안된다. 출발선이 다른 아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잠시라도 그 차이를 유예해보는 경험, 혼자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함께 가보는 경험, 패배한 이를 낙오자가 아닌 동료로 호명해보는 경험은 경쟁에서 무조건 이겨야하는 개인이 아니라, 공적인 감각으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민주시민을 만들어낸다. 만약 교육이 이러한 일을 내려놓는 순간, 사회는 스스로를 지탱할 마지막 토대를 잃을 것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교육은 반드시 공동의 경험이어야 하는가. 그렇다. 정확히는, 공동이 짊어져야 할 몫을 개인에게 떠넘기지 않는 것, 그것이 공교육이 공교육인 이유다. 화려한 신기술도, 개별 책임의 회피도 답이 될 순 없다. 다시 '마주 보는 교육'으로 돌아가자. 그럴 때에만, 우리는 코로나 세대가 남긴 경고에 비로소 제대로된 답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