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서가 귀한 나라
'삼국사'라도 제대로 불러야
우리나라 역사학계에는 작은 거짓들이 당연한 사실처럼 통용되고 있다.
사서의 제호, 국가의 국호, 최초 국가의 전설이 그 대표적 예다.
반만년을 자랑하면서도 그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상고대 역사는 국호 하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자랑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심각하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보유한 가장 중요한 사서의 제호부터 바로잡고자 한다.
국호 문제는 지난 글 "고조선은 없다: 고대 국가명이 우선"에서 한 번 다루었고,
국가의 전설은 다음 글로 넘기겠다.
다만 '삼국사'라는 제호만은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짚어야겠다.
삼국사가 증언하는 삼국의 복잡한 관계
삼국사는 고구리·백제·신라의 복잡한 관계를 압축하여,
우리 종족의 범위를 사마천의 사기 등의 지나 사서들에서 규정한 한족·화하족과 분명히 구분하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삼국사는 동아시아 사서 가운데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다.
왜인은 수시로 신라의 경계를 넘어 서울까지 침략하는 존재이지만,
박혁거세가 건국할 때 처음 등장하는 외교관 호공은 "본래 왜인"이라 하였다.
193년 벌휴이사금 때는 왜에 기근이 들어
천여 명이 먹을 것을 구하러 신라로 왔으며,
백제가 망할 때 왜인은 백제와 운명을 같이한다.
고구리에게 백제나 신라가 타자가 아닌 것처럼,
백제와 신라에게도 왜인은 결코 이방인이 아니었다.
삼국사가 아니면 이러한 미묘한 관계는 알 수 없다.
그밖에 여러 사서의 단편과 유적들로부터
고구리는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干(간)·可汗(가한)·韓(한)이 지배하는
소국들도 많이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와 당의 지배자들도 선비족의 하나라 하니,
선비·흉노·돌궐 등의 종족을
우리 역사에서 칼로 무를 베듯 타자로 분리할 수 없다.
삼국사는 이러한 복잡한 구도를 삼국이라는 틀로 압축하여 전달한 사서다.
사서가 귀한 나라의 현실
다음은 고리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며 문인인 김부식이 쓴
'삼국사'에 의하여 정의되는 삼국시대가 이어진다.
그 후 약 오십 년의 혼란기인 후삼국시대를 수습한 고리의 역사를 적은 '고리사'가 있다.
역성혁명으로 건국한 후조선이 있으나,
안타깝게도 '실록'은 남아 있으면서도 '후조선사'는 없다.
나라를 일시적으로 빼앗겼던 35년 동안 주권을 찾는 일이 우선 급하였고,
정권 수립 직후 발발한 625전쟁의 수습이 뒤따랐다 하더라도,
광복 80년이 지난 오늘까지
수만의 사학 전공자가 배출된 나라에서
후조선사를 편찬하지 못하였음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왕조실록이라는 자료는 있으되
그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지 못한 씁쓸한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반만년의 역사와 면적 대비
다량의 세계적 기록문화유산을 자랑하는 우리나라가 사서라고는
달랑 삼국사와 고리사 둘밖에 없는,
사서 편찬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나라인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다스린 삼국의 중심 강역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와 일본이 조작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국가 예산을 써서 지나의 동북공정을 저지하라는 목적으로 설립한 연구단체가
두 나라의 거짓을 강화해 주는 하위 기관처럼 행동한다.
해체하거나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고 설립 목적에 걸맞는 연구를 서두를 일이다.

'삼국사기'라는 기록은 거의 없다
삼국사를 편찬한 김부식은 고리사 권17 인종3 병인 23년 12월 기사에
'金富軾進所撰三國史(김부식이 자신이 찬술한 삼국사를 바쳤다)'라고 하여
제호를 분명히 '삼국사'라 하였다.
불과 몇 질뿐이지만 남아있는 유물의 표지제가 '삼국사'이고, 판심제 역시 '삼국사'이다.
더욱이 重刊(중간)한 분들도 발문에 삼국사라고 명시하였다.
다만 卷首題(권수제)만 '三國史記卷第○○'로 되어 있어 오해의 소지가 있으나,
이는 '삼국사를 기록하는 제○○권'일 뿐이며 記(기)가 제호의 일부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이를 제호로 인정한다면 고리사의 각 권도 세가·열전 등으로 따로 불러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
* 권수제: 여러 권으로 이루어진 서적에서 특정 순번의 책 머리에 별도로 세우는 제목. 권수제를 제호로 삼는 명명법은 표지가 없어진 책에 궁여지책으로 적용한 수단으로, 책을 항상 복수로 발행하던 우리나라에는 일반화할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DB에서 '三國史記'를 검색하면 4건에 그치는 반면,
'三國史'는 26건 30회로 압도적이다.
4건을 면밀히 검토하면 세조 때도 성종 때도
모두 양성지(梁誠之)의 상소문에만 집중되어 있다.
2건은 '三國史記東國史略高麗全史'라는 문구로서
문맥상 '삼국사를 쓴 동국사략' 또는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으로 번역된다.
기존의 삼국사는 문체가 어떤 곳은 너무 번잡하고 어떤 곳은 너무 소략하다는
태종의 비판으로 ‘동국사략’이 집필되었던 분위기를 고려해야 한다.
단지 나머지 2건은 '삼국사기'를 서명으로 사용한 듯한 사례로 볼 수도 있다.
(세조 2년 3월 28일 丁酉) 文科則四書、五經外, 只講 '左傳', '史記', '通鑑', '宋元節要', '三國史記', '高麗史'…→ 문과는 사서·오경 외에 좌전·사기·통감·송원절요·삼국사기·고리사만을 강하며…
(세조 10년 8월 1일 壬午) 臣平日觀三國史記, 東人與漢人戰, 則十戰而七勝…→ 신이 평일에 삼국사기를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인과 싸우면 열 번 중 일곱 번을 이기고…
그럼에도 세조 10년의 기사도 ‘삼국사기’라고 단정할 수 없고,
“삼국사의 기록” 또는 “삼국의 역사 기록”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삼국사기'라는 표현은 세조 2년의 기록은 남게 되어
‘삼국사기’ 용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동문수에서는 김부식의 편찬 완수 보고서 제목이 '진삼국사표'인데,
동문선에서는 '진삼국사기표'로 되어 있어
두 문헌 사이에 차이가 있다.
동문수와 동문선은 그 밖에도 臣富軾과 臣某, 命臣編集과 命老臣俾之編集 등
여러 곳에서 다른 글자나 문구가 확인되어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
대학 강단 사학계에서 '삼국사기'가 옳다는 증거로 인용하는
남송 시대 類書(유서; 백과사전류)인 玉海(옥해) 권16에는
'淳熙三國史記' 및 '三國史記' 두 항목이 보인다.
그러나 이 기사는 다음 이유에서 서명 근거로서의 신뢰성이 낮다.
첫째, 목록에 연호를 앞세워 마치 편찬 연도가 순희 때인 것처럼 읽히게 하였다.
둘째, 내용에 '海東三國史記'라 하여 접두사 '해동'을 붙임으로써 원래 서명이 그것인 듯 읽히게 하였다.
셋째, 두 기사 사이에 다른 항목을 끼워 별개 항목으로 재등재한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
삼국유사에서도 삼국사를 인용한 곳 10곳 중
딱 1곳에만 '삼국사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 구절 '按三國史記 百濟 聖王 二十六年…'도
'삼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 성왕 26년…'으로 번역할 수 있어,
서명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삼국사기'는 언제부터 유행하였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 이전에 '삼국사기'라는 기록이 없지는 않지만 매우 드물다.
그렇다면 이 오칭을 누가 언제부터 퍼뜨렸는가?
알고 나면 누구나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1) 후조선이 망하기 전인 1908년 일본인 釋尾春芿(석미춘잉)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朝鮮古書刊行會(조선고서간행회)에서
1909년에 최초로 '三國史記 全'이라는 제호로 현대 활자 단행본을 발행하였다.
석미춘잉은 식민지 지배를 지지하는 언설 형성에 관여한 인물로 오늘날 비판적 재평가의 대상이다.
2) 1913년에는 서양사학을 전공하여 문학박사를 취득하고
유럽 유학까지 마친 동경대 교수 坪井九馬三(평정구마삼)이
신활자 7책본 '삼국사기'를 발행하였다.
예문(例問)에 따르면 가하본·근위본·신전본·금택본·정상본
5종을 대비하며 교감하였다 하니,
학자적 엄밀성 자체는 평가할 만하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오칭의 보급에 기여하였다.
3) 1914년 3월, 최남선 선생이 조선광문회 명의로 '삼국사기' 2책을 발행하였다.
일본인들이 이미 삼국사기라는 제호를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최남선 선생이 그 오칭을 수용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과 같이 고착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4) 같은 해 5월, 또 다른 일본인 靑柳綱太郞(청류강태랑)이 조선연구회 명의로
일본어 번역본과 원본을 합본하여 발행하였다.
표지에는 압록강·두만강 이남을 붉게 칠한 지도를 넣었다.
이 인물은 식민지 지배 정당화 저서를 다수 출판하여 오늘날 비판적으로 평가된다.
5) 1928년에는 대표적 군국주의 관련자로 알려진
今西龍(금서룡)이 주축인 조선사학회가
서문에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논리를 노골적으로 주입하며 발행하였다.
해제가 일본어로만 쓰여 있어 독자 대상도 불분명하다.
6) 1931년에는 영인본이지만 50권 전질을 역시
'삼국사기'라는 제호로 일본인 주관 고전간행회에서 발행하였다.
이상 23년 사이 6차례에 걸쳐 ‘삼국사기’라는 표지로
경쟁적으로 출판되어 기정사실화되었다.
三人成虎(삼인성호)요 曾參殺人(증삼살인)이라 하거니와,
불과 23년의 무차별 공세에 제호가 초토화된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군국주의의 압력을 받은 일본 학자들이
실증사학이라는 학문적 용어를 앞세워
백지 상태의 학생들을 세뇌시킴으로써
우리 역사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이러한 왜곡이 광복 후 80년이 지났으나,
그들에게 교육받은 학자들이 문교부장관·박물관장·연구소장을 역임하며
철옹성을 구축하고 올바른 주장을 하는 후학들의 싹조차 잘라버렸다.
천문학·생물학 등 주변 학문 전공자들이 다양한 지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분석한 논문을 제출하더라도
철저히 외면하여 사장(死藏)시켜 왔다.
뿐만이 아니다.
일반인이지만 오재성이라는 분은
앞 글에 쓴 필자의 삼국사로 바꾸어야 한다는 논리 대부분을 제시하며,
2014년 7월 31일 “삼국사기를 삼국사로 명명해야 함”,
2015년 3월 31일 “보물 제 525호의 삼국사기를 보물 표지제 삼국사로 변경요청” 등으로
국민신문고 등에 문제제기를 하였음에도 문화재청에서는
권수제가 1순위 등이라는 형식 논리의 답변으로 일관하였다.
오늘날은 전문 교육기관이 인터넷으로 대체되고
기초 지식은 인공지능이 해결해 주는 시대가 되었다.
다양한 지식을 갖추고 창발적 사고로 연구하는
오재성선생과 같은 국민의 수준이
오히려 전업 사학자를 앞서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학연·지연으로 뭉쳐 국민을 무시하던
강단 사학의 왜곡은 이제 무너질 일만 남았다.
이제라도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