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선지자 말라기가 전한 날선 예언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그 예언 말입니다(말 1:10). 구약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는 왜 그런 뼈아픈 메시지로 예언을 시작했습니까? 아쉽게도 요즘 신자들은 말라기 선지자를 잘 모르나 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다양한 이론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후기 구조주의를 넘어 해체주의까지 왔습니다. 말라기서를 묵상하자니 해체주의가 어른거립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과는 사뭇 다름을 피부로 느낍니다.
온건한 비판은 그나마 감사하게 받을 일입니다. 교회를 향해 매질하듯 퍼부어대는 냉소적인 언어들을 보십시오. 그 거친 언어 파편 속에 해체주의가 내뱉는 주제도 있습니다. 어쩌면 선지자 말라기는 2천년 전에 이미 해체주의가 바라본 시선 흐름을 간파했나 봅니다. 그런데 말라기와는 또 다른 시선으로 해체주의를 말한 이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기록한 요한계시록을 보십시오. 요한계시록에는 다양한 주제가 뒤엉켜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새 하늘과 새 땅, 곧 신천지 아니겠습니까(계 21:1).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 보다 새 예루살렘이 더 중요한 핵심주제입니다. 그리고 그 새 예루살렘을 보면서 또 다른 해체주의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성전 없는 예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 문서는 모두 사도 요한이 기록했음을 전제합니다. 이를 토대로 요한계시록 기록 연대를 살펴봅니다.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이들은 거의 1세기 말엽 이후를 지지합니다. 자, 그러면 기록 시기와 맞물린 그 시대 상황은 어떻습니까? 박해와 순교로 얼룩진 그 시대 상황은 분명 로마 제국과 연관됩니다. 소위 황제숭배가 본격화되면서 정치 지형이 급변합니다.
하지만 로마는 원만한 식민 통치를 위해 전통 종교는 인정했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회를 어떻게 보는가입니다. 유대교 한 분파로 본다면 전통 종교입니다. 그러나 만일 유대교 분파가 아닌 다른 종교로 본다면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 기원은 매우 짧습니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신흥 종교이며 제거 대상입니다.
교회가 그런 시대 상황을 읽었다면 마땅히 대책이 나와야 합니다. 과연 교회가 내놓은 대안은 무엇입니까? 박해 시대를 살아내야 할 성도에게 준 메시지는 과연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은 그 시대 상황과 동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면 돌파하는 시원한 말씀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인지 요한계시록에는 신기할 만큼 신학주제가 넘칩니다. 오늘은 그중 하나인 성전신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앞서 요한계시록 기록 연대를 1세기 말엽으로 추정했습니다. 그 시대쯤이라면 과연 예루살렘 성전 상태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놓친 한 가지가 바로 이 상황입니다.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장군 티투스(Titus)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초토화하며 숱한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이 무렵 예수님 형제인 야고보와 유다도 순교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학살을 세밀히 살펴보면 레위 지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유대교 양대 산맥이었던 사두개파가 멸절됩니다. 그 결과 유대교는 바리새파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그러니 이후 유대교를 2차 유대교라 부름이 좋습니다. 그 후 바리새파 랍비와 장로들은 치열하게 신학논쟁을 펼쳤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쟁점은 "성전 없는 예배" 가능성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제사장은 몰살당했습니다. 그러니 설사 성전이 세워진다고 해도 제사장 없는 예배가 될 뿐입니다. 그 상황에서 바리새파 지도자들이 찾아낸 유대교 재건 주제입니다. 그래도 성전 없는 예배가 가능함은 말씀이 있어서 라는 확신입니다. 바리새파로 재건된 유대교는 그렇게 정경화 작업을 진행합니다. 그 결과 구약 24권(우리 관점에서는 39권)만이 정경(Canon)임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 결정에서 우리가 놓친 심각한 선언 하나가 더 있습니다. 바로 유대교가 기독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입니다. 회당예배를 위한 회당 열여덟 개 기도문 중 열두 번째에 나오는 항목입니다. 그 결과 유대계 기독교인들은 회당예배에 전혀 참여할 수가 없게됩니다. 더는 회당이 복음 전도를 위한 매개체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유대교와는 아예 단절이라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요한계시록을 보십시오. 그러면 아주 흥미로운 장면 하나가 나옵니다. 사도 요한이 바라본 새 예루살렘 성을 자세히 주목하고 성찰하십시오. 새 예루살렘 성 규모를 살핌도 나름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신학 관점에서 새 예루살렘 성을 보십시오. 그리고 사도 요한이 그 물음에 어떤 답을 내놓았는지도 살펴보십시오. 질문은 하나, 새 예루살렘 성에 성전은 있는가입니다(계 21:22).
사도 요한은 이제까지 어디에서 환상을 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리로 올라오라는 하늘 예배 그 현장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 보좌를 보았고 우렁찬 찬송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양이 펼치신 그 신비한 광경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끝 모를 신비로 이어지며 예언 그 의미를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어느덧 막바지인 듯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분명 사도 요한은 파괴된 예루살렘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억이 생생한 모든 장소가 하나같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랬던 요한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견고한 모양새로 내려옵니다. 그 웅장함에 놀라고 성전이 없다는 사실에 더 놀라워합니다. 그리고 번뜩 주님이 주신 말씀을 떠올리며 깨닫게 됩니다.
돌아보니 기독교회는 처음부터 성전 없는 예배가 핵심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당연히 예배 장소를 가리킵니다. 누군가는 예루살렘 교회를 말하며 성전에서 예배했다고 우깁니다. 하지만 성전은 제사장들이 장악한 희생제사 본거지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사도라도 성전에서는 주변인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회는 성전 없는 예배가 일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성전 없는 예배가 결론임을 잘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믿음의 눈, 곧 영안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눈만 그렇겠습니까? 듣는 귀도 영이 열려야 됩니다. 성도라면 보는 세계가 달라야 하고, 듣는 소리도 달라야 합니다. "밖으로 불러냈다"는 교회란 말 자체가 세상과는 다른 자리를 가리킵니다. 구별된 성도란 말도 그렇지 않습니까? 무언가는 달라야 믿음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성도인지 아닌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니 새 예루살렘 성을 다시 보십시오. 그리고 그 성안에 성전, 곧 자리가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혹시라도 형식주의에 매몰된 예배를 의식했다면 다행입니다. 왜냐면 그나마 영적 감각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그렇습니다. 성전 없는 예배를 말하니 누군가는 그러면 가나안 성도는 어떠냐고 묻습니다. 노파심에서 다시 말합니다만 저는 가나안 성도를 지지하거나 응원하지 않습니다. 예배 본질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이 하나에 달렸음을 강조할 뿐입니다. 성전 없는 예배 본질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