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고 묵상해야 하는지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누군가는 질문 속에 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기록된 내용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언들이 어떤 상황에서 주어졌는지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출발점을 의식하고 있는 한 관점을 비껴갈 수 없습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은 어떤 상황에서 계시를 받았습니까? 누가 그 귀한 환상을 보여주며 기록하라 하셨습니까? 전개되는 모든 장면이 어떤 상황과 직결되어 있습니까? 그 모두가 예배 현장임을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예배 실황중계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인데 그 장소가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 곧 천상 예배입니다.
어떤 예배가 진짜인지 굳이 묻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예배가 얼마든지 가능한 세상사를 보십시오. 밧모 섬에서 바라본 예배를 세밀하게 살펴보십시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조촐함을 넘어 초라함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요한이 체험한 예배를 넘어설 진짜가 있습니까? 무수히 많은 짝퉁에 손뼉 치거나 환호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주님 앞에 항복하듯 넙죽 엎드리는 경배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요한계시록에 담긴 메시지를 기억하십시오. 왜냐면 그 예배만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삼십 년 넘게 교회음악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사역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많은 교회 음악인을 만났습니다. 지휘자며 작곡자며 연주자들을 셀 수 없을 만큼 만났습니다. 또한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들과 교제하며 교회음악 신학을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렇게 교회음악에 속한 장르가 무엇인지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제 나름 정리한 교회음악 장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배음악, 둘째는 교제 음악입니다. 예배음악을 흔히 찬송가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맞는 말인데 깊이 살펴보면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예배음악은 찬송가라고 보아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교회 내에서 통용되는 교제 음악입니다. 우선은 세속 음악과 경계가 있는지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교회음악 학자가 풀어야 할 과제 아니겠습니까?
먼저 글(밧모 섬 유배 생활, ‘불금’보다 뜨거웠던 ‘부활 일요일’의 추억)에서 요한계시록에는 신앙 언어가 많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 "할렐루야"와 "마라나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할렐루야는 누구라도 다 아는 찬송언어입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할렐루야는 의미상 권유보다는 명령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찬송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 앞에 찬양해야 한다는 지시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의무입니다.
어쩌면 할렐루야는 찬송언어 중 최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할렐루야는 쉽게 나올 언어가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을 잘 살펴보시면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혹시 성경 66권 중 할렐루야가 사용된 성경을 아십니까? 모두 몇 권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할렐루야가 수록된 성경이 달랑 두 권뿐임을 아십니까? 구약에서 한 권, 신약에서 한 권만이 할렐루야가 있습니다. 의외로 이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두 권에만 할렐루야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두 권이 시편과 요한계시록입니다. 시편이 어떤 책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할렐루야가 기록된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입니까?
기왕 할렐루야 이야기가 나왔으니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할렐루야는 시편에 23회, 요한계시록에 4회 모두 27회 나옵니다. 저는 성경을 해석할 때 "삶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할렐루야가 기록된 시편과 요한계시록 삶의 자리가 어디겠습니까? 공교롭게도 시편과 요한계시록 모두 할렐루야가 뒤편에 나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19장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여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묵상하며 할렐루야 의미를 되새김합니다. 예전에는 병원과 약국에 이런 표어가 붙어있었습니다.
"약 좋다고 남용하지 말고 약 모르고 오용하지 말자"
제가 이 칼럼을 연재하는 작은 바람은 예배 회복입니다. 그렇게 천상 예배를 꿈꾸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할렐루야 사용 빈도수를 헤아려보십시오. 그 의미는 고사하고 이젠 인사말처럼 활용되기도 합니다. 외부에서 강사가 오면 으레 손들고 인사처럼 할렐루야를 말합니다. 어떤 강사는 손사래를 치며 극구 사양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러려니 하며 받아줍니다. 하지만 묵인보다는 할렐루야, 그 의미를 설명해주면 더 좋겠습니다. 왜냐면 할렐루야는 남용도, 오용도 묵과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마라나타"는 어떻습니까? 혹시 이 말을 들어는 보았습니까? 할렐루야가 시편과 요한계시록에만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할렐루야는 오래된 신앙언어입니다. 반면 마라나타는 어떻습니까? 아람어인 마라나타는 직역하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재미있게도 고린도전서에는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로 나옵니다(고전 16:22). 반면 요한계시록에는 마라나타를 직역했습니다(계 22:20,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요즘 성도에게 마라나타는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그 단어가 가장 고상한 신앙언어임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까놓고 말하면 마라나타를 모른다면 사도행전 묵상은 곤란합니다. 초대교회 신앙, 그 분위기를 아예 모른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솔직히 신약성경 전부는 초대교회 신앙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말하면 마라나타 없이는 신약성경도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소중한 신앙언어인데 우리는 까맣게 잊었습니다.
할렐루야와 마라나타, 우리가 지나쳤거나 잊었던 신앙언어입니다. 우리 예배가 할렐루야를 회복하고 마라나타를 되살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