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가 개막되며 서양 세력이 동아시아 해역으로 진출했을 때, 그들이 가장 먼저 접한 세련된 상인 집단은 류큐 왕국(琉球王國)의 상인들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들을 레키오(Lequio,Lequios)라 불렀으며, 이 명칭은 유럽 세계가 류큐를 인식하는 최초의 창구가 되었다. 레키오는 단순한 음차 표기가 아니라, 당시 류큐가 국제 무역 질서 속에서 차지하던 위상을 반영한 이름이었다.
레키오라는 명칭은 ‘류큐(琉球)’의 발음을 포르투갈어식으로 옮긴 결과로 이해된다. 1511년 포르투갈이 말라카(Malacca)를 점령하면서, 이미 그곳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류큐 상인 집단이 유럽인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
말라카는 동서 해상 교역의 결절점이었고, 류큐는 중국,일본,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계 무역의 핵심 축이었다. 이로 인해 유럽의 항해 지도와 기록에는 류큐 열도가 레키오스라는 이름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외교관이자 약제사였던 토메 피레스(Tomé Pires)는 동방제국기(Suma Oriental)에서 레키오인을 극찬했다. 그는 레키오인을 “매우 정직하고 신용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라 기록하며, 담보 없이도 외상 거래가 가능할 만큼 상거래 질서가 엄격했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레키오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동포를 노예로 팔지 않는 원칙을 지켰다고 강조했다. 이는 당시 노예 무역이 일상적이던 동남아시아에서 매우 이례적인 윤리 의식이었다.
레키오인은 무력을 과시하는 집단은 아니었으나, 정당한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는 단호했다. 피레스는 레키오인들이 신용을 저버린 상대에게는 끝까지 대가를 회수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류큐가 단순히 온화한 나라가 아니라, 규범과 신뢰 위에서 움직이는 자율적 해양 국가였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상업 활동은 중국 비단과 도자기,일본의 금과 구리,동남아 향료를 잇는 광범위한 네트워크 위에서 이루어졌다.
유럽 문헌에는 레키오 외에도 고레스(Gores)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는 고려(Goryeo)와의 혼동 또는 류큐 집단 내부의 특정 세력을 지칭한 표현으로 해석된다.
중요한 점은, 16세기 유럽 세계가 류큐를 단순한 변방이 아니라 동아시아 항로의 핵심 거점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군사력이 아닌 신뢰와 교역으로 구축된 국제적 명성이었다.
레키오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류큐인의 이미지는 ‘무력에 의존하지 않는 해양 상업 국가’의 전형이었다. 이 평판은 중국 책봉 체제 안에서도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했던 류큐의 외교 전략과 맞닿아 있다.
레키오의 윤리와 자부심은 오늘날 오키나와에 남아 있는 ‘이치리바쵸데(一度会えば皆兄弟:한 번 만나면 형제)’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레키오는 단순한 외래 명칭이 아니라, 류큐 왕국이 세계와 맺은 관계의 결과물이다. 16세기 유럽인이 목격한 레키오인의 정직함과 인간성은 오늘날에도 오키나와 문화 정체성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류큐는 무력보다 신뢰로 기억된 드문 해양 국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