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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에서의 창조와 인간의 지적 유희, 바라(Bara)와 에디팅(editing)

'무(無)'에서 온 말씀과 '유(有)'에서 온 재구성

피조물 인간이 누리는 편집이라는 지적 자유

신의 창조 세계를 새롭게 맥락화하는 사명

 

AI 이미지 (제공: 미디어 울림)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전도서의 이 오래된 선언은 현대 크리에이티브 업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진리로 통한다. 우리는 매일 '혁신'과 '창조'를 외치지만, 냉정하게 자문해보자. 우리가 만든 것 중에 단 하나라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튀어나온 것이 있는가? 예술인들에게는 ‘창조의 고통’이 따른다고 하지만, 김정운 박사는 그의 저서 '에디톨로지'를 통해 "창조는 곧 편집"이라고 단언하며 인간의 창조적 환상을 깨트린다. 

 

반면, 성경의 첫 페이지는 인간의 편집과는 차원이 다른 ‘바라(בָּרָא, Bara, ’창조하다')', 즉 무(無)에서의 창조를 선포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거대한 지적 충돌을 목격한다. 인간의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교묘한 재배열일 뿐인가, 아니면 그 너머에 신의 창조적 DNA가 흐르고 있는 것인가? 신의 '바라'와 인간의 '에디팅(editing)'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답을 찾는 과정이다.

 

 

에디톨로지의 시대와 성서의 '바라'가 만날 때

 

김정운 박사가 주창한 '에디톨로지(Editology)'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지식 권력을 해체하는 날카로운 도구다. 그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중요한 것은 정보의 소유가 아니라, 정보를 어떻게 연결하고 맥락화(Contextualization)하느냐에 있다고 본다. 즉, 창조는 정보와 정보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편집 능력'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효율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반면, 성서신학에서 말하는 창조, 특히 히브리어 '바라(בָּרָא, Bara)'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어로 쓰이는 독점적 동사다. 이는 재료가 없는 상태에서 존재를 불러내는 신적 권능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 '무에서의 창조' 교리를 통해 신과 피조물의 절대적 차이를 강조해 왔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을 깊이 들여다보면, 신의 창조 과정 또한 빛과 어둠을 '나누고', 물과 뭍을 '구분하는' 등 일종의 '배열'과 '정돈'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현대의 편집 개념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전문가의 눈으로 본 편집과 창조의 층위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크게 두 가지 층위로 나눈다. 첫째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존재의 근원을 만드는 '시원적 창조(בָּרָא)'이고, 둘째는 이미 만들어진 재료를 가지고 형태를 빚으시는 '조성적 창조(יָצַר / עָשָׂה)'다. 인지심리학자 김정운 박사의 '편집'은 바로 이 두 번째 층위인 '조성'의 영역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전문가들은 인간의 뇌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때 기존의 스키마(Schema)와 연결하여 재구성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인간의 창조적 행위가 생물학적으로 '편집'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사회적 견해 또한 흥미롭다. 현대 사회에서 창의성은 '낯선 조합'에서 나온다는 것이 정설이다. 스티브 잡스가 "창의성이란 그저 사물들을 연결하는 것(Connecting things)"이라고 말한 것은 에디톨로지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지만 성서신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이 편집할 수 있는 '재료' 자체를 누가 제공했느냐는 질문이다. 인간의 편집이 '지적 유희'라면, 신의 창조는 그 유희가 가능하도록 '캔버스와 물감'을 마련해 준 근원적 사건이다. 결국, 다양한 관점을 종합해볼 때 인간의 편집은 신의 창조라는 거대한 텍스트 위에서 벌어지는 변주곡과 같다.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편집적 창조'의 가치

 

김정운의 에디톨로지와 성서적 창조론이 공유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는 '혼돈(Tohu)에서 질서(Cosmos)로'의 이행이다. 창세기 1장 2절은 창조 직전의 상태를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이 혼돈 속에 경계를 짓고 이름을 붙여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바로 편집의 본질이다. 편집은 무작위로 흩어진 정보들 사이에서 '의미'라는 질서를 세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 받았다는 성서적 선언은, 인간이 신의 '편집적 성향'을 물려받았음을 시사한다. 신이 세상을 종류대로 나누고 이름을 붙였듯, 인간은 개념을 정의하고 정보를 분류하며 문명을 편집해 나간다. 차이점은 분명하다. 신은 '존재 자체'를 창조함으로써 편집의 근거를 마련했고, 인간은 그 '존재의 관계'를 재창조함으로써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데이터에 따르면, 현대의 가장 혁신적인 기술들은 대개 기존 기술의 '편집적 결합'에서 탄생했다. 이는 인간이 신의 창조 영역인 '무(無)'에 도전하기보다, 신이 허락하신 '유(有)'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편집할 때 가장 인간다운 창의성이 발휘됨을 증명한다. 따라서 김정운 박사의 편집론은 신의 창조 권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창조적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가장 현대적인 언어로 설명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신은 무엇을 편집하고 있는가?

 

결국 '바라'와 '에디팅'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창조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두 막(幕)이다. 신이 무대와 배우를 만드셨다면, 인간은 그 위에서 시나리오를 편집하고 연출하며 세상을 완성해 나간다. 우리는 결코 신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 하지만 신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재료들을 가지고 누구보다 독창적인 이야기를 편집해낼 자유와 책임이 있다.

 

김정운 박사가 말하는 '편집의 즐거움'은 사실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던 그 신성한 기쁨의 파편이다.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이라는 텍스트를 어떤 맥락으로 편집하고 있는가?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가, 아니면 혼돈 속에 질서를 세우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신의 창조 세계를 맡은 '수석 에디터'들이다. 우리의 편집이 단순히 지적 유희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더 따뜻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청지기적 창조'가 되기를 소망한다. 당신이 오늘 내리는 선택과 연결하는 가치들이 모여, 신의 창조를 더욱 빛나게 하는 당신만의 위대한 작품이 완성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 허동보 목사 ]

ㆍ現 수현교회 담임목사

ㆍ現 수현북스 대표

ㆍ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석사(M.Div)

ㆍ미국 Covenant University 신학석사(Th.m)

작성 2026.01.01 07:42 수정 2026.01.01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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