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시선이 미세 공정의 끝단인 3나노, 2나노에 쏠려 있는 사이, 한편에서는 '구형'으로 치부되던 8인치(200mm) 웨이퍼 공정이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TSMC와 삼성전자가 수익성이 낮은 8인치 사업 비중을 과감히 정리하면서, 그 공백을 메우려는 수요가 폭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 8인치의 역습, "없어서 못 만드는 지경"
10일 관련 업계와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전 세계 10대 파운드리 업체의 8인치 평균 가동률은 내년 80%를 거쳐 2026년에는 90%선에 육박할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국내 8인치 파운드리의 강자인 DB하이텍의 경우, 올해 연간 가동률이 사실상 풀가동 수준인 98%를 상회할 것이라는 유력한 전망이 나온다.
이러한 기현상의 배경에는 인공지능(AI) 산업의 급팽창이 자리 잡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로봇, 전기차 등 전력 소모가 극심한 분야가 늘어나면서 전력을 효율적으로 제어하는 '전력반도체(PMIC)'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최첨단 공정보다는 안정성과 비용 효율이 중요한 PMIC 특성상 8인치 공정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핵심 생산 거점이다.
■ 거인들의 이탈이 불러온 '골든 타임'
삼성전자와 TSMC는 현재 12인치(300mm) 선단 공정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최근 컨퍼런스 콜을 통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8인치 레거시 라인을 순차적으로 폐쇄하고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공정으로 전환하겠다는 전략을 공식화했다.
거물들이 시장에서 발을 빼자 공급 능력은 자연스럽게 축소됐다. 옴디아의 분석에 따르면 글로벌 8인치 월간 생산량은 올해를 기점으로 향후 수년간 지속적인 감소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수요는 거꾸로 치솟으면서 공급자 우위 시장이 형성됐고, 이는 곧 '판가 인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 DB하이텍, '낙수효과' 넘어 실적 퀀텀점프 예고
공급 부족 현상의 최대 수혜자는 DB하이텍이다. 중국의 SMIC나 화홍 등 8인치 주력 업체들이 쏟아지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넘치는 물량이 DB하이텍으로 빠르게 유입되고 있다. 그 결과 지난 1분기 DB하이텍의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21% 상승한 637억 원을 기록했으며, 영업이익률 또한 견고한 두 자릿수를 유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2분기부터 본격화된 제품 가격 인상 효과가 하반기 실적에 고스란히 반영될 것으로 보고 있다. 트렌드포스는 올해 8인치 파운드리의 평균 판가가 최대 20%까지 오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거물들이 떠난 자리를 독점적인 기술력으로 채운 레거시 강자들의 '즐거운 비명'은 당분간 멈추지 않을 기세다.
첨단 공정만이 정답인 것처럼 보이던 반도체 시장에서 8인치 레거시 공정은 '스페셜티'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거대 기업들의 전략적 후퇴가 중견 파운드리 업체들에게는 사상 유례없는 기회의 장을 열어준 셈이다. 하반기 반도체 실적의 진정한 주인공은 12인치가 아닌 8인치에서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