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홀로 피는 꽃은 없다/ 김종일
오월은 묻지 않는다
네가 어느 굽이진 길에서 발을 헛디뎠는지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어떤 멍 자국을 숨기고 왔는지
그저 수만 개의 연두색 손바닥을 펼쳐
기진한 너의 어깨 위로
말없이 제 몸을 굽혀 — 그느른다
빛도 그렇게 왔다
자격을 따지지 않는 무구한 정성으로
세상의 가장 낮은 그늘조차 빠뜨리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건
누군가의 저물지 않는 기도와 온기 속
온전히 그느름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오월의 숲, 그 거룩한 침묵 앞에서
나는 비로소 고백한다 —
세상의 어떤 꽃도 홀로 핀 적 없었음을
=================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잠시 손을 멈췄다. 창밖에는 오월의 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책상 위 커피는 식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식어가는 커피도, 쏟아지는 햇살도 아닌 — 오래전 내가 가장 깊이 무너졌던 어느 봄날을 떠올렸다. 그 봄에도 오월은 이렇게 왔다.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그냥 왔다. 그리고 나를 — 말없이 감쌌다. 시인 김종일은 오늘 이 시를 통해서 바로 그 자리를 건드렸다. 논리가 아니라 체온으로. 설명이 아니라 숨결로.
시는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좋은 시는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데서 태어난다. 슬픔을 "슬프다"고 쓰는 것은 시가 아니다. 슬픔이 독자의 가슴 속에서 스스로 일어나도록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진짜 시의 일이다. 이 작품은 그 일을 정확하게 해낸다. 첫 연을 보라.
오월은 묻지 않는다 / 네가 어느 굽이진 길에서 발을 헛디뎠는지 /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어떤 멍자국을 숨기고 왔는지
"굽이진 길"과 "멍자국"이라는 두 이미지. 시인은 삶의 상처를 직접 거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 상처의 질감을 건네준다. 굽이진 길은 직선으로 가지 못한 삶의 우회를, 멍자국은 드러내지 못하고 안으로만 삭인 고통을 말한다. 독자는 이 두 단어 앞에서 저마다 자신의 굽이와 멍을 꺼내 놓는다. 시인이 대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 말하게 만드는 것 — 이것이 이 시의 첫 번째 힘이다.
'그느르다' — 언어가 사상이 되는 순간
이 시의 핵심은 동사 하나에 있다. '그느르다.' 편을 들어 감싸주다, 보살펴 준다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 영어로도, 한자로도 번역이 되지 않는 말이다. 아니, 정확히는 번역이 되는 순간 그 말이 가진 온기의 절반이 증발해 버리는 말이다.
시인은 이 동사를 오월의 행위로 정의한다.
그저 수만 개의 연두색 손바닥을 펼쳐 / 기진한 너의 어깨 위로 / 말없이 제 몸을 굽혀 — 그느른다
"수만 개의 연두색 손바닥" 이 표현을 읽는 순간, 누구나 머릿속에 새잎이 돋아난 봄나무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을 '잎'이라 부르지 않는다. '손바닥'이라 부른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자연의 이미지가 갑자기 인격의 이미지로 전환되는 이 순간, 오월은 더 이상 계절이 아니다. 오월은 누군가가 된다. 나를 감싸주는, 이름 없는 누군가. 대시(—) 하나를 앞에 둔 "그느른다"라는 동사의 배치는 마치 긴 호흡 뒤의 고요한 포옹처럼 읽힌다. 그 침묵의 무게가 행간에 가득하다.
언어를 통해 사상이 탄생하는 방식을 오래 연구해온 시학의 관점에서, 이 연은 하나의 발견이다. 시인이 언어를 찾은 것이 아니라, 언어가 시인을 통해 마침내 제 뜻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빛의 신학, 혹은 자격 없는 은혜
세 번째 연은 조용하지만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린다.
빛도 그렇게 왔다 / 자격을 따지지 않는 무구한 정성으로 / 세상의 가장 낮은 그늘조차 빠뜨리지 않고
"자격을 따지지 않는." 이 구절 앞에서 나는 오래 멈췄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얼마나 철저하게 자격을 묻는가. 스펙을 묻고, 출신을 묻고, 성과를 묻는다. 햇빛 한 줄기를 받는 데도 어딘가에 등록을 해야 할 것 같은 시대. 그런데 오월의 빛은, 정말로, 묻지 않는다. 가장 좁고 낮은 그늘에도, 아무 조건 없이 들어온다.
시인은 여기서 자연현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가장 갈망하는 어떤 것 — 무조건적인 수용과 돌봄 — 을 오월의 빛에 얹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 언어로 말하자면 '은혜'에 해당하고, 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무조건적 긍정'에 해당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어떤 무거운 개념어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빛도 그렇게 왔다"고 말한다. 그 단순함 속에 무한한 깊이가 담겨 있다.
존재의 가장 오래된 비밀
네 번째 연은 이 시 전체의 철학적 핵심이다.
살아 있다는 건 / 누군가의 저물지 않는 기도와 온기 속 / 온전히 그느름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살아 있다는 건." 시인은 삶의 정의를 새로 쓰려고 한다. 보통 우리는 살아있음을 호흡이나 심장 박동, 혹은 의지와 행위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삶은 수동태다. 받는 것이다. 그느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역설적 정의가 독자의 가슴 어딘가를 세게 두드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 그것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피어났다고, 나는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말한다. 아니라고. "저물지 않는 기도와 온기 속"에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그느름을 받고 있다고. 그것이 부모일 수도 있고, 오월의 바람일 수도 있고, 아직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의 선의일 수도 있다. 존재란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그느름의 겹침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가 말하는 가장 오래된, 그러나 우리가 자꾸만 잊어버리는 비밀이다.
고백으로 끝나는 시, 고백으로 시작되는 삶
마지막 연은 이 시에서 가장 담백하고, 그래서 가장 강하다.
오월의 숲, 그 거룩한 침묵 앞에서 / 나는 비로소 고백한다 — / 세상의 어떤 꽃도 홀로 핀 적 없었음을
"비로소"라는 부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한 단어 안에는, 오래 몰랐던 것, 혹은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 혹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마침내 받아들이는 인간의 시간이 담겨 있다. 고백은 패배가 아니다.
고백은 해방이다. "홀로 피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우리 삶에 스며든 수많은 손길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손길들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에게 손길을 내밀 수 있다.
제목 "홀로 피는 꽃은 없다"라는 시를 다 읽고 나서 다시 보면 전혀 다른 무게로 읽힌다. 처음에는 식물학적 사실처럼 보였던 이 문장이, 마지막에는 인간 존재의 선언문이 되어 있다.
시평가의 고백
여기서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시평을 쓰는 사람도 결국 독자다. 그리고 나는 이 시 앞에서, 오래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렸다. 나를 아무 조건 없이 감싸주었던 사람들의 얼굴. 내가 무너졌을 때 말없이 옆에 있어 주었던 시간들. 내가 그 온기 속에서 살아났다는 사실. 시인의 언어가 날카로운 것은, 그것이 보편을 찌르는 척하면서 사실은 당신의 가장 개인적인 기억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그렇게 온다. 이론으로 오지 않고, 삶으로 온다. 오월처럼. 묻지 않고, 그냥.
이 시를 읽은 뒤 잠시 창밖을 바라보기를 권한다. 지금 당신 곁에서 바람이 불고 있다면, 그 바람도 지금 당신을 — 그느르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