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욱의 시집 『동강』에는 오래 살아온 사람만이 붙들 수 있는 풍경과 마음의 결이 담겨 있다. 시인은 강과 바다, 시장과 골목, 병원과 기차역 같은 익숙한 삶의 자리를 지나며 사랑과 상실, 기억과 시간을 조용히 비춘다. 그래서 이 시집은 낯선 상징보다 우리 곁의 생활과 감정을 더 깊이 건드린다.
“태풍에 흔들리던 유년의 창문이 아프고 / 시린 12월의 높은 하늘이 아프다.” 이 한 구절은 『동강』이 품고 있는 정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집의 시들은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고, 사라진 시간을 돌아보며, 무심히 흘러가는 하루의 표정 속에서 끝내 사람의 마음을 놓지 않는다. 아픔을 과장하지 않고, 쓸쓸함마저 생활의 일부처럼 받아안는 시상이 오래 남는다.
『동강』은 화려한 언어보다 진심 어린 온도와 삶의 무게를 믿는 독자에게 잘 닿는 시집이다. 한 편 한 편 읽다 보면 강을 따라 걷는 듯, 누군가의 지나온 계절을 함께 건너는 듯한 마음이 든다. 조용하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시를 만나고 싶은 독자에게 이 시집은 충분히 오래 머물 책이다.
<작가소개>
시인 박종욱
• 69세
• 부산 産
• 영점오구구 동인
• 퇴직 기자
• 경기 파주시 거주
병을 앓고 쉬면서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오래 묵은 것 몇 편,
수년 전 쓴 것 몇 편,
근래 쓴 것을 묶었는데
둘러보니 부끄러움만 키운 꼴이다.
다만 박제되지 않는 꿈,
오래 기억하고자 했다.
<이 책의 목차>
제1부. 동강
그 사랑, 어리석음
낙타와 당나귀
동강 (1)
동강 (2)
동강 (3)
시처럼 소설처럼
그래도 쓸쓸하면
계단을 내려가며
애벌레의 꿈
지금 그 주막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동전 던지기
바벨탑의 신화가 있기로
사랑은 치욕이다
천리포
바람의 여행
라일락
봄밤의 왈츠
당신이 옳았습니다
겨울 철원
교하, 겨울 아침 (1)
교하, 겨울 아침 (2)
봄비 오네요
젖은 눈동자
사람의 일
꽃향기
제2부. 섬
공원에 가면
고궁의 비
섬
진눈깨비
옛날 치킨
커피의 요정
바둑을 두면서
북한강
철길
다시 철길
신성리 갈대밭
명파리
태백
사북
경주행
금촌시장
어느 4월
서검도(西檢島)
신촌일기
봄맞이
봄이 온다고
꽃이 지는 이유
꽃이 아니어도 좋다
꽃이 시들 때
안 먹고는 살 수 없는
대한민국 뉴스
GTX를 타고
어른 되기
특공대
다시 걷습니다
11월
제3부. 소리
불면(不眠)에 대하여
눈 치우는 아침
소리
운동의 법칙
남색 점퍼
이발을 깎다니
세상 사는 맛
낙엽들 노래하다
욕실에서
시장에 있다
편의점 L씨
꽁치
불가사리는 상투적이다
감기
옥수수
IPTV 시불 염불
그해 겨울 우리는
방충망
시(詩)
안개
타인의 방
부피가 아니고 무게입니다
유튜브
의사
2024년 봄
선택적 기억
<본문 詩 ‘라일락’ 전문>
어느 길모퉁이 바람결에 라일락
눈물이 핑 돕니다
무엇을 잊었을까요 봄비
씻겨져 버렸을까요
한 걸음 두 걸음
그 향기 환청처럼 사라집니다
누구였을까요 청춘
아름답던 그 모습
라일락 꽃잎처럼
기억나지 않습니다
<추천사>
박종욱의 시집 『동강』을 읽고 있으면, 한 사람이 살아오며 마음속에 쌓아둔 풍경들이 조용히 펼쳐지는 느낌을 받는다. 강가의 바람, 겨울 아침의 공기, 시장 골목의 기척, 병원과 편의점과 기차역 같은 생활의 자리와, 그 사이로 사랑과 상실, 그리움과 체념이 잔잔하게 번져 나온다. 그래서 독자는 낯선 세계로 끌려가기보다 자기 삶의 어느 한때를 가만히 돌아보게 된다.
제1부의 시편들은 이 시집의 바탕을 이루는 정서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동강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과 감정이 흘러가는 마음의 물길처럼 읽힌다. “정선장(旌善場) 허탕 치고 와도 아라리 춤사위 / 막걸리 한 사발에 동강 유역 농부들 한숨은 깊어간다”라는 구절에는 지역의 숨결과 사람들의 삶이 함께 실려 있다. 박종욱의 시는 풍경을 그리면서도 그 안에 사람의 한숨과 기다림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강은 더 깊어지고, 그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의 표정으로 남는다.
시인이 이 시집에 남기려는 것은 사랑의 흔적인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뜨겁고 선명한 한순간보다 지나간 뒤에야 더 또렷해진다. 「그 사랑, 어리석음」, 「당신이 옳았습니다」, 「사람의 일」 같은 시편들에는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쓸쓸함과 뒤늦은 깨달음이 담겨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 잊지 못하는 일, 끝내 마음 한구석이 비어 있는 채 살아가는 일이 모두 사람의 일이라고 시인은 담담하게 말한다. 그래서 읽는 이도 자기 안의 오래된 얼굴들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 시집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이유는 감정을 늘 생활의 바닥 위에 놓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강과 바다와 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금촌시장도 있고, 편의점도 있고, 병원 진료실과 IPTV 앞의 저녁도 있다. 「편의점 L씨」에는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는 한 사람의 일상이 담겨 있고, 「의사」에는 늙어가는 몸 앞에서 느끼는 허망함과 두려움이 비친다. 「부피가 아니고 무게입니다」에서는 이사하며 책을 덜어내는 현실이 삶의 무게로 이어진다. 이런 시편들 덕분에 『동강』은 우리의 시간을 담은 사진첩 같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천천히 선명해지는 것은, 쓸쓸함을 다루는 태도다. 『동강』에는 외로움이 자주 스민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한쪽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교하, 겨울 아침」에는 추위 속에서도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살아있고, 「다시 걷습니다」에는 더딘 걸음 끝에도 다시 걸어가려는 마음이 남아 있다. 시인은 쓸쓸함보다 그 안에서 놓이지 않는 온기와 기척을 함께 보여준다.
지나온 세월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이 시집의 중요한 결이다. 박종욱의 시에는 젊음에 대한 그리움이 있으나, 그것을 함부로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간 시간을 있는 그대로 돌아보며, 그 안에 남은 허망함과 부끄러움까지 함께 끌어안는다. “태풍에 흔들리던 유년의 창문이 아프고 / 시린 12월의 높은 하늘이 아프다”라는 구절은 오래된 기억이 어떻게 삶 전체의 감각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시집의 아픔은 순간의 감상이 아니라 세월 속에서 천천히 굳어진 감각이다.
『동강』은 화려한 수사보다 오래 살아낸 사람이 건네는 말의 온도에 더 마음이 가는 독자에게 잘 닿는 시집이다. 살아오며 잃어버린 것이 있는 사람, 누구에게도 다 말하지 못한 그리움을 품고 사는 사람, 나이 들수록 마음 한쪽이 더 선명해지는 사람이라면 이 시집을 가까이 둘 만하다. 강을 노래하지만 끝내 사람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동강』의 깊이다. 이 시집을 덮고 나면 몇 편의 시를 읽었다기보다 한 사람의 계절을 함께 지나온 느낌이 남는다. 그래서 『동강』은 오래 곁에 두고 천천히 다시 펼쳐도 좋은 시집이다.
(박종욱 지음 / 보민출판사 펴냄 / 156쪽 / 변형판형(135*210mm) / 값 12,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