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을 관통했던 핵심 키워드가 '역세권'이었다면, 이제는 '슬세권(슬리퍼 생활권)'이 주거의 질을 결정하는 새로운 척도로 급부상했다. 퇴근 후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서 10분 내에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즐기거나 필요한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이 단순한 편의를 넘어 생존과 직결된 주거 복지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기연구원이 23일 발표한 '경기도 보행 생활권 가치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도민들의 주거지 선택 기준이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조사를 통해 나타난 수치는 가히 놀랍다. 거주지 선택 시 주변 편의시설 유무를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응답자가 4년 사이 약 5%p 가까이 상승하며 18.2%를 기록했다. 이는 교통의 편리성만큼이나 '나의 동네'에서 누리는 정주 여건의 가치가 높아졌음을 방증한다.

특히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1인 가구의 폭발적 증가가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 내 혼자 사는 가구 비중이 30%를 돌파하고, 청년 가구 중 절반 이상이 독립 가구를 형성함에 따라 주거 공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다. 좁은 원룸이나 오피스텔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휴식과 사교의 기능을 동네 카페와 편의점이 대신 수행하는 것이다. 즉, 집 앞 골목이 1인 가구에게는 넓은 거실이자 서재가 되는 이른바 '공유 거실'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
연구원이 도내 전역을 정밀 분석한 결과, 슬세권 혜택이 가장 집중된 곳은 수원시(83.1%)로 나타났으며 부천시(80.7%)와 안양시(75.8%)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들 지역은 도보 500m 이내에 상업, 의료, 문화 시설이 조밀하게 밀집해 있어 보행만으로도 일상적인 욕구 충족이 가능하다. 반면, 경기도 전체 면적의 약 70%는 여전히 이러한 인프라가 부족한 '생활 서비스 취약 지역'으로 분류되어 지역 간 양극화 현상을 드러냈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부동산 거래 데이터와의 상관관계다. 슬세권 지수가 높은 상위 지역의 전월세 거래량은 취약 지역 대비 무려 16배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수요자들이 단순한 가격 논리를 넘어, 동네가 제공하는 '생활 콘텐츠'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살기 편한 동네에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 경제적 활력이 도는 선순환 구조가 증명된 셈이다.
이에 대해 경기연구원은 단순한 시설 확충을 넘어선 '생활 밀착형 정책 패키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인프라가 열악한 지역을 '생활권 집중 개선지구'로 지정하여 보행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야간 보행 안전을 위한 스마트 가로등 설치 등 기초적인 정주 여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공실 상태인 상가를 활용해 청년들이 선호하는 편의시설 유치를 지원하는 '민간 유도형 마중물 정책'의 필요성도 강조됐다.
특히 지리적 특성상 민간 상권 형성이 어려운 지역에는 공공이 직접 서비스를 배달하는 '찾아가는 생활 복지' 모델이 도입될 전망이다. 마을 커뮤니티 센터 내에 공유 세탁소와 건조기 등 필수 가전 시설을 배치하고, 무인 택배함이나 생활물품 픽업 거점을 구축하여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는 방식이다. 나아가 의료 취약 지역에는 정기적으로 순환하는 '이동형 스마트 클리닉'을 운영해 경기도민이라면 누구나 소외됨 없이 슬세권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김희재 경기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제 도시 행정의 패러다임은 거대 담론이나 대규모 토목 공사에서 벗어나, 도민의 일상을 세심하게 살피는 '미시적 생활환경 조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라며 "공공이 민간 활력의 기반을 마련해준다면 경기도는 전역이 슬리퍼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도보 천국'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역설했다.
주거지는 이제 단순히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닌, 삶의 스펙트럼이 펼쳐지는 무대다. 경기도가 추진하는 '보행 중심 생활권 정책'은 미래 도시가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촘촘한 생활 인프라와 안전한 보행로가 결합된 슬세권의 완성은 경기도의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핵심 열쇠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