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를 본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네가 잘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는 장면입니다(렘 1:11-19).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거듭 "무엇을 보느냐" 물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두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까?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내용만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에게는 무엇을 보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내용만 전해야 참 선지자입니다. 그렇게 선지자가 듣고 바라본 자세가 관점(View point)입니다. 문제는 이미 주신 말씀을 풀어가는 확장된 관점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 도구가 활용됩니다. 망원경과 현미경은 모두 보기 위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그 용도는 사뭇 다릅니다. 성경 이해에도 망원경 혹은 현미경처럼 보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학자들은 이런 방식을 거시관점과 미시관점이라 부릅니다. 십계명이 기록된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을 보십시오. 같은 내용이 반복됨은 하나님 강조점임을 놓치지 마십시오. 특히 안식일을 말하는 제4계명을 주목하십시오. 그 내용을 거시관점과 미시관점으로 접근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뜻이 더욱 진지하게 드러납니다.
출애굽기는 홍해를 건넌 1세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또한 그 계명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공포에 떨며 모세가 대신 말해주길 간청합니다(출 20:19).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반면 신명기는 요단강을 건널 2세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지 대략 40년이 되어가던 시점입니다.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백성을 모아놓고 세 차례 설교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백성에게 유언 형식으로 남긴 율법입니다. 그러니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언급된 십계명은 엄연히 대상이 다릅니다. 출애굽 1세대는 해방과 자유는 얻었으나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1세대에게 시내 산에서 주신 제4계명을 보십시오(출 20:8-11).
그 핵심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데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에 쉬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출애굽기에 나온 제4계명을 이렇게 정리해도 되겠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이유는 하나님 창조와 연관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셨다는, 쉼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신명기에 나오는 제4계명은 어떻습니까? 주문은 똑같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설명 내용이 확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이집트에서 종이 되었던 너희, 곧 이스라엘 정체성입니다. 그런 너희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인도하여 내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인도하신, 이를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 핵심은 강한 손과 편 팔로 건지신, 곧 하나님께서 일하심입니다. 신학 관점으로 구원은 거듭남(Born again), 곧 재창조입니다. 그러니 재창조는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근거한 제4계명은 하나님 하신 창조와 쉼입니다. 반면 신명기는 하나님이 하신 재창조와 일하심이 요점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이유와 근거가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그에 따라 출애굽기에 근거한 안식일 관련 사건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머물 때였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하고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결과 온 회중이 그 사람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민 15:32-36). 안식일과 쉼, 그 상관관계를 기억하십시오.
반면 신명기에 근거한 제4계명 관련 사건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혹시 여리고 성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아십니까? 여리고 성은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마주한 견고하고 거대한 성입니다. 어쩌면 가나안 정복은 여리고 성 함락과 맞물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리고 성 함락은 가나안 정복 성공을 위한 첫 단추인 셈입니다.
자, 그러면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여리고 성은 누가, 어떻게 무너뜨렸습니까?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이라고는 달랑 하나였습니다. 매일같이 일어나 일렬로 성을 한 번씩 도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돌았습니까?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한 주가 내내 돌았습니다. 더구나 마지막 날, 곧 일곱째 날에는 자그마치 일곱 번 돌았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일곱 번을 침묵하며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사장 나팔이 울려 퍼지자 백성이 크게 소리칩니다. 또한 그 함성이 진짜 찬송임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러자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져내립니다. 백성이 들어가 그 성을 점령하고 구별하여 온전히 바칩니다(수 6장).
이제 여러분께 진짜로 묻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그러니 하루도 거르지 않은 그 일주일에 안식일도 포함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분명 칠 일간 여리고 성을 돌았으니 그중 하루는 안식일입니다. 더구나 새벽부터 일곱 번을 돌던 그날이 안식일로 보입니다. 왜냐면 온전히 바친 물건이란 설명이 그렇습니다(수 6:21, 7:1). 하나님께 바쳐진, 곧 성물이란 의미 아닙니까? 심지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일했다는 증거 아닙니까?
안식일에 예배와 쉼이 아니라 엄청나게 일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자 백성이 그 안으로 달려갑니다. 온전히 바친 물건을 거두기 위한 또 다른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영락없이 안식일에 모두가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일로 인해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분명 안식일에 일했는데도 아무도 죽은 이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신명기에 근거한,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관건입니다. 아울러 백성 역시 하나님께서 일하심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에는 "명령"이라는 군사 용어가 나옵니다(신 5:15).
자, 이쯤에서 우리에게 오직 하나인 성경해석 기준치를 보겠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안식일에 관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이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안식을 이해함이 옳습니다. 먼저 안식일과 관련된 두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
첫째는 안식일에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쳤을 때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늑대처럼 물고 뜯으며 인신공격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둘째는 또 다른 안식일에 길을 가다가 제자들이 밀이삭을 비벼 먹었습니다. 그때도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일한다며 제자들을 맹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종합하면 예수님은 출애굽기와 신명기 모두를 보셨습니다.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 주권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곱씹어 성찰하면 출애굽기에 따른 이해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은 어떻습니까? 굳이 깊은 성찰이 아니어도 쉽게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이는 요한문서, 특히 요한복음 주제 설명과도 연관됩니다.
요한복음 중심 주제 중 하나가 구원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강한 손과 편 팔로 일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일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분명 구원과 예배입니다. 그러니 두 본문에 담긴 제4계명, 그 진전된 의미를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안식일에 내포된 창조와 재창조, 쉼과 구원을 새기십시오.
쉼은 그저 쉼이 아니라 거룩한 쉼일 때를 뜻합니다. 그러니 거룩한 쉼이 예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일하심처럼 우리도 구원 역사를 감당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 하나님의 좋은 군사로 쓰임 받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