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 만행산 자락, 토지가 6%에 불과한 작은 산촌 상신마을. 이곳에서 18년째 땅을 일구며 발효의 시간을 지켜온 전통발효음식연구가 고광자 대표를 만났다. 된장을 담그는 손길이 마당의 정원으로 이어지고 그 정원이 다시 도시와 농촌을 잇는 관광의 길이 되는 삶. 거창한 구호를 내려놓은 자리에 오히려 또렷한 길 하나가 남았다.
18년 전, 만행산이 그녀를 불렀다
고 대표가 농업의 길로 들어선 지 올해로 18년째다. 그녀가 터를 잡은 곳은 남원시 산동면 상신마을. 보절면과 산동면 경계에 솟은 만행산 자락에 안긴 이 마을은 산이 94%를 차지하고 경작 가능한 토지는 6%에 불과한 산촌이다. '만행(萬行)'은 불가에서 수행자가 걸식하며 산야를 돌던 두타행에서 온 이름. 그 이름처럼 이 산은 오래전부터 사람을 품고 먹여 살렸다.
"옛날에는 이 작은 마을에 60가구가 살았다고 해요. 토지가 이렇게 적은데 뭘 먹고 살았을까, 지금도 궁금해요."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그녀는 산에서 찾는다.
"바다는 바다가 먹이고 산은 산이 먹여 살린다잖아요. 만행산이 우리 마을을 품고 있는 이유예요."
현재 상신마을에 남은 가구는 15호. 대부분 퇴직 후 귀촌한 이들이다. 전국 대부분의 농촌이 '인구 소멸 지역'으로 분류되는 시대지만 고 대표는 이 마을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으리라 믿는다. 산이 내어주는 먹거리와 풍경이 여전히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 믿음 위에서 그는 농사를 짓고 장을 담갔다. 18년의 세월은 '농촌 문화 운동'에 대한 공로로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상을, 농촌 발전 기여로 농촌진흥청장상을 안겨주었다.
정조지를 복원하는 손, 부뚜막의 철학
고 대표의 또 다른 이름은 '전통발효음식연구가'다. 그녀는 공존밥상실록식문화 대표이자 조선시대 고조리서 『정조지(鼎俎志)』의 미료지류 복원사업에 참여한 발효문화 전문가로 오랜 세월 부뚜막 앞에서 장의 온도를 지켜왔다.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고 가마솥에 콩을 삶는 일. 메주를 띄우고 장을 가르는 일. 그녀의 손끝을 거친 된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기다림의 결정체다.
"된장은 결국 사람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생명이에요."
발효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콩이 메주가 되고 메주가 된장이 되기까지 필요한 것은 손의 기술보다 계절의 인내다. 겨울이 콩을 익히고 정월의 찬 공기가 메주를 띄우고 봄의 햇빛이 장독을 달군다. 고 대표는 그 모든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다. 기다림 자체가 맛이 된다는 걸 오래전에 배웠기 때문이다.
연구라는 딱딱한 말을 썩 좋아하지 않는 그녀이지만 부뚜막 앞에서 그녀가 지켜온 시간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이자 기록이다.
하늘모퉁이, 예약 없이도 밥 한 끼
인터뷰 내내 고 대표가 가장 오래 머문 주제는 뜻밖에도 '밥 한 끼'였다. 그녀가 운영하는 '하늘모퉁이'는 근사한 식당도, 번듯한 연구소도 아니다. 그녀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누구나 와서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어제도 지나가던 사람들이 들러서 같이 국수 삶아 먹었어요. 마당 옆 나물 뜯어다가요."
예약은 따로 받지 않는다. 그날 들에서 거둔 제철 나물, 직접 담근 김치, 금방 지은 고슬고슬한 밥. 파무침, 부추김치, 방금 꺾어 온 두릅이 상에 오른다. 그녀에게 밥상은 곧 그 계절의 자연이고 손님은 길을 지나다 그 자연과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다.
숙박도 같은 결이다. 아직 정식으로 민박업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찾아온 이들이 하루 묵고 갈 수 있도록 방을 내어준다. 하늘모퉁이는 농업을 매개로 한 농촌문화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농업이 단순한 생산활동을 넘어 경관과 문화, 사람과의 연결고리로 진화하는 흐름의 중심에 있다.
"우리 집에 와서 밥 한 끼 먹고 하루 자고 가면 친정집 나들이 온 기분, 외갓집 나들이 온 기분이었으면 좋겠어요. 그 사소한 기쁨을 주고 싶어요."
작아질수록 또렷해지는 길
한때 고 대표의 꿈은 컸다. '농촌 운동가'를 자처하며 농촌을 살리는 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 그림이 한결 작아졌다. 대신 또렷해졌다.
"나이가 드니 자꾸 현실적이 돼요. 삶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더라고요. 이 나이에 생계에만 매여 산다면 쓸쓸하잖아요. 이제는 오히려 '적게 가지고 사는 법'을 배워야겠다 싶어요."
올해 초 다녀온 경북 고령 여행이 그녀 생각에 방점을 찍었다. 비슷한 규모의 작은 지역을 둘러보면서 "내 지역을 제대로 보려면 다른 지역도 다녀봐야 한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고 한다.
"여러 갈래였던 길이 한두 갈래로 좁혀지더라고요. 선명해지고 굵어지고."
그 좁혀진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원'이다.

정원, 농촌문화가 관광이 되는 자리
올해 고 대표가 가장 공들이는 작업은 집과 정원을 정리하는 일이다. 그녀는 남원 지역 농업인들로 구성된 '정원가꾸기' 모임에 참여하며 1년 단위의 정원 계획을 꾸리고 있다.
"정원은 이제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누구나 정원을 가꾸면서 사는 시대가 왔어요."
그녀가 말하는 정원은 단순한 화단이 아니다. 만행산이라는 장엄한 자연 환경과 인간이 가꾼 정원이 만나 빚어내는 ‘컬처 믹스’ 즉 문화의 혼합이다.
"자연과 인위적으로 가꾼 정원이 이어지면 또 다른 문화가 돼요. 자연 그 자체와도 다르고 도시의 공원과도 달라요. 농촌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풍경이죠."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농촌의 담장을 넘는다. 도시의 감각과 농촌의 자연이 서로 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가 다시 사람을 부른다. 주 5일은 도시에서, 주말 2일은 농촌에서 사는 '5도2촌' 라이프스타일이 각광받는 흐름 속에서 하늘모퉁이는 도시민이 농촌의 리듬을 경험하는 현실적인 창구 역할을 해왔다. 정년퇴임을 앞둔 중장년층은 이곳에서 시골살이를 미리 체험하고 도시의 젊은 세대는 로컬 감성에 이끌려 찾아온다.
"남원 하면 예전에는 광한루였잖아요. 이제는 개인이 가꾸는 정원이 관광지가 되는 시대예요. 강원도 영월 어느 집, 누군가의 마당—그런 곳들이 여행 지도에 찍히고 있어요."
실제로 전국에서는 농가의 정원이 사적인 공간을 넘어 관광 명소로 자리 잡는 흐름이 뚜렷하다. 고 대표는 이 흐름 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한다.
"남원에는 아직 민간정원 등록지가 하나도 없어요. 제 목표는 '남원 민간정원 1호'가 되는 거예요. 정원이 곧 농업의 문화고, 농업의 문화는 곧 관광이라고 생각해요."
발효음식의 부뚜막과 마당의 정원이 한 공간 안에서 만나고, 거기에 지나가던 길손의 밥상이 더해지는 풍경. 그것이 그녀가 그리는 농촌문화의 모습이다.
집을 정리하고, 문을 열다
고 대표는 올해를 "집을 정리하는 해"로 정했다. 공간을 정돈하고 정원을 가꿔 민박의 문을 정식으로 열고 나아가 남원 민간정원 1호 등록을 준비하는 것이 목표다. 그동안 쌓아온 발효문화의 경험은 체험 프로그램의 형태로 도시의 손님들과 만나게 될 예정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일을 지원해 주는 사람이 주변에 생기면 삶이 훨씬 윤택해져요."
혼자 일하는 것이 편했던 그녀가 이제 가장 힘주어 말하는 단어는 '함께'다.
"인간은 절대 혼자 사는 게 아니더라고요.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을 하는 모임이나 동아리에 적극적으로 찾아가세요. 저도 요즘은 그렇게 찾아가요."
봄이 깊어지는 만행산 자락, 고광자 대표의 부뚜막에서는 오늘도 발효의 시간이 조용히 흐른다. 된장이 익고 정원이 자라고 길 가던 누군가가 밥 한 끼 얻어먹고 간다. 거창하지 않지만 따뜻하고 작지만 또렷한 삶. 하늘모퉁이는 그렇게 산촌의 시간 속에서 도시와 농촌, 사람과 자연을 잇고 있다. - 밥 한끼의 온도를 지키고 있는 만행산 하늘모퉁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