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4월, 테헤란의 광장은 검은 물결로 넘실댄다. ‘아야메 샤하다트’를 맞아 알리와 후세인의 순교를 기리는 시아 무슬림들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그들의 가슴을 치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북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같은 시각, 예루살렘의 언덕에선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진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생명의 기쁨을 노래하는 부활의 합창이다.
시아파 이슬람의 카르발라(Karbala)가 억울한 죽음에 대한 비통함과 복수의 의지를 불태우는 ‘기억의 제단’이라면, 기독교의 부활절은 그 죽음조차 용서로 승화시킨 빈 무덤의 ‘승리 선언’이다. 죽음이라는 인류 공통의 절망 앞에서, 이토록 상반된 두 방식의 유비(Analogy)를 통해 오늘날 중동의 포성을 멈출 진정한 소망의 길을 묻는다.
카르발라의 통곡: 피로 쓴 시아파의 ‘영원한 복수극’
오랜 기간 이슬람권 현장에서 시아 무슬림들을 보면서 느낀 점은, 그들의 영혼 깊숙한 곳에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슬픔의 근원은 7세기 카르발라 평원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한 이맘 후세인의 죽음에 있다. 시아파에게 죽음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영원히 기억하고 슬퍼하며 복수를 다짐해야 할 ‘한(恨)’의 정서다.
그들에게 순교는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다 쓰러진 성자의 고귀한 희생이며, 그 피를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종교적 정체성이 된다. 2026년 현재, 이란이 이스라엘과 서방을 향해 보이는 강경한 태도 이면에는 “우리는 카르발라의 후예이며, 다시는 배신당하지 않겠다”라는 비장한 결의가 흐른다. 하지만 이 비통함은 필연적으로 ‘눈에는 눈’이라는 보복의 논리를 낳는다.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은 곧 미사일의 궤적이 되어 적의 심장을 겨냥하게 되는 것이다. 슬픔이 증오를 먹고 자라는 악순환, 이것이 카르발라가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빈 무덤의 승리: 증오를 용서로 바꾼 ‘사망의 전복’
반면, 기독교가 선포하는 부활절은 죽음을 대하는 전혀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역시 억울하게 고난받고 처형당하셨다는 점에선 후세인과 닮아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빈 무덤’에 있다. 기독교의 부활은 죽음의 현장을 통곡의 장소로 남겨두지 않고, 오히려 죽음 그 자체를 조롱하며 이겨버린 승리의 현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부활의 주님은 무덤 문을 열고 나오시며 제자들에게 “너희를 배신한 자들에게 복수하라”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대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을 향해 ‘용서’라는 이름의 생명을 선물하셨다.
기독교의 죽음은 복수의 동력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기 위한 씨앗의 죽음이다. 빈 무덤은 죽음이 끝이 아니며,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고 생명이 사망보다 압도적임을 확증하는 보증이다. 우리가 부활절에 흰 옷을 입고 찬양하는 이유는 죽음의 한을 씻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해방감 때문이다.
2026년, 보복의 지정학을 넘어서는 ‘부활의 영성’
2026년 4월, 미·중 패권 전쟁의 그림자와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 속에서 인류는 다시금 카르발라의 논리에 갇혀 있다. “상대가 나를 때렸으니 나도 더 크게 때려야 한다”라는 보복의 정치가 전 세계를 집어삼키려 한다. 이스파한의 지하 핵시설에서 굴착기를 든 특수부대원들이 느끼는 공포와, 그들을 향해 보복을 다짐하는 이란 강경파의 외침은 모두 죽음의 공포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합주곡이다.
이 냉혹한 현실 속에 부활의 메시지는 기발하고도 독특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죽어야 산다”라는 역설적인 진리다. 나를 지키기 위해 상대를 죽이는 방식이 아니라, 나를 드려 상대를 살리는 부활의 영성이야말로 이 시대의 유일한 해독제다. 2026년의 봄, 중동의 포성을 멈출 수 있는 것은 더 강력한 미사일이 아니라, 빈 무덤에서 흘러나오는 ‘용서와 화해’의 생명력이다. 복수의 한을 품은 통곡이 부활의 소망을 품은 노래로 바뀔 때, 비로소 중동의 대지에는 진정한 안식이 찾아올 수 있다.
통곡의 강을 건너 승리의 언덕으로
나는 오랜 시간 무슬림 친구들과 함께 울며 그들의 가슴 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의 진심 어린 슬픔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늘 그들의 눈물 끝에 평화가 맺히기를 기도했다. 4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다시 한번 텅 빈 무덤의 신비를 묵상한다. 그곳에는 피 흘린 흔적은 있어도, 복수의 서약은 없다. 오직 무덤을 이기고 나오신 주님의 따뜻한 숨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카르발라의 통곡을 멈추라고 말한다. 이제 그 눈물을 닦고,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신 부활의 승리에 동참하라고 초대한다. 2026년의 불안한 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증오의 달력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이다. 죽음을 이기는 방식이 복수가 아니라 사랑임을 증명하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갈 때, 우리 삶의 무덤 문도 활짝 열릴 것이다. 텅 빈 무덤이 주는 그 영원한 자유가, 통곡하는 모든 영혼에 깃들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