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호라는 이름의 신기루, 예루살렘의 봄
해마다 봄이 오면 기독교 세계는 가장 엄숙하고도 찬란한 주간을 맞이한다. 부활 주일을 일주일 앞둔 '종려주일(Palm Sunday)'이다. 2천 년 전 예루살렘 성문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람들은 자신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 장면은 언뜻 승전국의 장군이 입성하는 화려한 퍼레이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축제의 이면에는 지독한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서려 있다. 군중이 기대한 것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해 줄 강력한 정치적 메시아, 즉 '정복자'였다. 그러나 그들의 환호 속에 입성하는 예수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의 핵심인 '겸손'과 '희생'의 시작이다.
나귀를 탄 왕과 인간의 욕망: 성경과 꾸란이 말하는 '겸손'
성경 스가랴 9장 9절은 이 장면을 예고한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라." 예수는 군마(軍馬)를 타고 칼을 휘두르는 왕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는 평화의 왕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Quran)에서도 예수(이싸)를 매우 특별한 예언자로 다룬다는 점이다. 꾸란 19장 30~31절에서 예수는 "나는 신의 종이라. 그분께서 내게 성서를 주시고 나를 예언자로 삼으셨노라... 내가 어디에 있든 나를 축복받은 자로 만드셨도다"라고 고백한다. 무슬림들에게도 예수는 세속적인 권력을 탐하지 않고 오직 신의 뜻에 복종한 '무슬림(복종하는 자)'의 완벽한 모델이다.
기독교 관점에서 볼 때, 종려주일의 핵심은 '자기 비움(Kenosis)'에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타인을 짓밟아 올라가려 하지만, 예수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무슬림들 역시 '자카트(Zakat, 자선)'와 '싸움(Saum, 단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신 앞에 단독자로 서기를 갈망한다. 종려 주간은 종교의 벽을 넘어, 비대해진 자아를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가르쳐 준다.
군중의 변심: 종이호랑이가 된 인간의 정의
종려주일의 환호는 불과 며칠 만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는 저주로 변했다. 이것이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실체다. 나의 이익을 채워줄 때는 '호산나'를 외치지만,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거나 손해를 끼칠 것 같으면 가차 없이 등을 돌린다.
종려 주간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가 믿는 것은 '신'인가, 아니면 '나의 필요를 채워줄 수단으로서의 신'인가? 예루살렘 거리에 흩뿌려진 종려나무 가지들은 금세 말라비틀어졌다. 뿌리 없는 열광은 그토록 허망하다. 종교 개혁가 칼뱅(John Calvin)은 인간의 마음을 '우상을 제조하는 공장'이라 비판했다. 우리는 지금도 종려 주간의 군중처럼, 내가 원하는 형상의 메시아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하고 있지는 않은가.
현대인의 일상에서 찾은 '나귀 새끼'의 철학
오늘날 우리 삶은 '스펙'과 '성공'이라는 군마를 타기 위한 전쟁터다. 남보다 더 큰 차, 더 높은 직급, 더 화려한 인맥을 자랑해야 살아남는다고 믿는다. 이런 세상에서 '나귀를 타라'는 메시지는 어리석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진짜 권위는 위압적인 태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진심 어린 경청,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눈물,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성실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종려 주간에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화려한 축제가 아니라, 고난의 길인 골고다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 예수의 '고독한 용기'다.
이슬람 전통에서도 '인내(Sabr)'는 신앙의 절반이라 불릴 만큼 중요하다. 기독교인이 고난주간을 통과하며 부활의 영광을 기다리듯, 무슬림들은 라마단 기간의 갈증을 견디며 신의 자비를 구한다. 두 종교 모두 '고통 뒤에 오는 참된 기쁨'을 이야기한다. 종려 주간은 그 고통의 터널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동시에 인간의 교만을 꺾는 겸손의 전시장이다.
마른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쥐고
나는 오랜 시간 중동의 분쟁 현장을 보았고, 나는 거기에서 수많은 '호산나'와 '십자가'를 보았다. 평화를 외치던 입술이 증오를 뱉어내고, 사랑을 맹세하던 손이 무기를 잡는 것을 목격할 때마다 가슴이 시렸다. 그리고 문득 내 안을 들여다본다.
나 역시 나만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고 싶어 안달 난 군중 중 한 명은 아니었을까. 박수갈채를 받을 때는 어깨를 으쓱하다가도,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거나 외면하면 금세 세상이 무너질 듯 원망하진 않았던가. 종려 주간이 되면 나는 책상 위에 작년에 쓰고 남은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올려둔다. 바스러질 듯 마른 그 가지는 내게 속삭인다. "네 열정의 유통기한은 여기까지냐"라고.
부활은 죽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죽음은 종려주일의 헛된 명성을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번 주간, 나는 화려한 군중 속이 아니라 예수가 나귀를 타고 지나갔던 그 좁고 먼지 나는 길목에 서 있고 싶다. 내 안의 욕심이 죽어야 비로소 타인의 영혼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체온이 다른 인간에게 전달되는 순간은 대단한 설교가 아니라, 함께 나귀 뒤를 따르며 흘리는 고요한 땀방울 속에 있다. 당신의 손에 들린 종려나무 가지는 지금 어떤 색을 띠고 있는가. 박수갈채가 사라진 뒤의 정적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