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접혀가는 푸른 우산, 유료화된 평화의 청구서
세상은 오랫동안 하나의 거대한 약속 위에 안주해 왔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함선들, 그리고 그 위를 수놓은 성조기는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우리 곁에 머물며 '항행의 자유'라는 이름의 평화를 보장했다. 우리는 그 평화가 무상으로 제공되는 자연의 섭리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세계 에너지의 숨통이라 불리는 호르무즈 해협 위로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세계의 경찰'이라는 이름표를 떼어내고, 냉혹한 비즈니스맨의 가방을 든 한 남자가 우리 앞에 서서 묻는다. "당신의 안보는 과연 얼마입니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던진 메시지는 명확하다 못해 잔혹하다. 그동안 미국은 막대한 천문학적 비용과 자국 청년들의 피를 대가로 국제 질서를 유지해 왔다. 동맹국들은 그 안보의 우산 아래서 저렴한 기름을 들여오고, 안전한 교역로를 누리며 경제 성장의 단맛을 향유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 당연해 보이던 '무상 급식'의 중단을 선언한다. 이제 안보는 가치와 이념의 영역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구독제 서비스'로 전환되었다. 그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를 향해 일갈한다. 미국은 이미 자급자족할 에너지가 충분하니, 석유가 필요한 자들은 미국에서 돈을 내고 사가든지, 아니면 직접 해협의 화염 속으로 들어가 직접 가져오라는 것이다. 이른바 'DIY(Do It Yourself) 안보' 시대의 개막이다.
이러한 변화는 오랜 우방이라 믿었던 대서양 동맹의 가치마저 뿌리째 흔들어 놓는다. 영국과 프랑스를 향한 트럼프의 비난은 외교적 수사라고 하기엔 너무나 노골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라며 발을 뺀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를 향해 트럼프는 배신감을 감추지 않는다. 한때 혈맹으로 불리던 '특별한 관계'는 이제 '기여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거래처 리스트로 전락했다. 이스라엘로 향하는 군수 물자의 영공 통과를 거부한 프랑스를 향한 경고 역시 서슬 퍼렇다. "미국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는 말 속에는, 기여 없는 동맹에게는 위기의 순간 미국 역시 곁에 없을 것이라는 최후통첩이 담겨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트럼프의 행보는 모순덩어리처럼 보인다. 세 번째 항공모함을 급파하고 수천 명의 병력을 집결시키며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모습은 언뜻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는 것처럼 읽힌다. 하지만 그 이면의 진실은 사뭇 다르다. 이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전열 정비가 아니라, 이란을 압도적인 힘으로 빠르게 '청산'하고 발을 빼기 위한 이른바 '최대 압박을 통한 최단기 퇴장' 전략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듯, 트럼프는 해협의 개방 여부와 상관없이 이란 문제를 종결짓고 싶어 한다. 심지어 40년 전부터 품어온 하르크 섬에 대한 전략적 구상을 다시 꺼내 든 것은, 그의 철수 의지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수십 년간 축적된 확고한 신념임을 증명한다.
결국 지금 호르무즈 해협에서 벌어지는 소동은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알리는 서막이다. 미국은 더 이상 타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자국군의 희생을 감내하지 않겠다는 '트랜잭셔널 외교'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이란은 사실상 궤멸되었다. 힘든 부분은 끝났으니 이제 당신들이 가서 직접 석유를 가져와라"라는 말은, 의존의 습관에 젖어 있던 동맹국들에게 던진 가장 차가운 현실 자각제다. 국제 관계의 기본 원칙이 추상적인 '가치'에서 '철저한 손익 계산'으로 이동한 지금, 세계 각국은 각자도생의 길 위에서 스스로의 안보 비용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