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시인 왕지환(王之涣)의 절창 등관작루(登鹳雀楼)에는 짧지만 오래 남는 두 구절이 있다.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욕궁천리목 갱상일층루).”
천 리 밖까지 보고 싶다면, 한 층 더 올라가라는 말이다.
이 말은 단순한 풍경 감상의 권유가 아니다. 인간의 시야와 통찰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꿰뚫는 통찰이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스스로의 한계를 확정 짓는다. 더 멀리 보고 싶다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곧 자신을 넘어서는 일이다.
세상은 늘 그런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 왔다.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사람, 한 층 더 오르려는 사람. 그러나 그 ‘높이’에는 언제나 질문이 따라붙는다.
그는 왜 올라가려 하는가.
다가오는 지방선거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이 시구를 떠올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 높은 자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 더 넓은 세상을 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더 많은 것을 차지하겠다는 것인지, 그 속내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진정으로 더 높은 곳에 올라 더 많은 사람을 내려다보며,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만들고자 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한 층 더 위’는 권력이 아니라 책임이다. 시야가 넓어진 만큼, 짊어져야 할 무게도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은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자신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그 자리를 탐한다. 그들에게 ‘더 높은 곳’은 단지 욕망의 높이일 뿐이다. 올라가는 이유가 비어 있는 자리에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나는 솔직히 말해, 그들처럼 치열하게 위를 향해 발버둥 치는 성격은 아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편이 더 익숙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가 위로 올라가는지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그 높이가 결국 나와 우리 모두의 삶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란다.
이번 선택에서만큼은, 단지 올라가려는 사람이 아니라 ‘왜 올라가려 하는지’가 분명한 사람이 더 많이 선택되기를.
천 리를 보겠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높은 자리 그 자체가 아니다.
그 높이에서 무엇을 보려 하는지, 그리고 본 것을 위해 무엇을 감당하려 하는지—
그 마음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높이 올라간 사람이 많은 세상이 아니라
올라간 만큼 더 넓게, 더 깊게 바라보는 사람이 많은 세상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