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 합의하고 룰 정해서 싸운 건데 왜 학교폭력인가요?”
최근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나 경찰 조사실에서 가해 청소년들이 당당하게 내뱉는 항변이다. 과거 골목길의 은밀한 금품 갈취나 언어·신체적 괴롭힘에 머물던 학교폭력이 최근에는 격투기 콘텐츠와 신종 유행을 방패막이 삼아 한층 잔혹하고 교묘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이른바 ‘야차룰(길거리 무제한 격투)’과 ‘스파링(권투·격투기 연습 경기)’을 빙자한 신종 폭력이 교실과 놀이터, 인적이 드문 지하 주차장으로 독버섯처럼 번져가는 실태다.
‘야차룰’이 무엇이길래... 무규칙 길거리 싸움이 청소년 문화로 변질
‘야차룰’은 격투기 유튜브 콘텐츠 등에서 파생된 은어로, 일반적인 스포츠 룰을 벗어나 보호장구 없이 맨주먹과 거친 타격, 심지어 꺾기나 내동댕이치기까지 허용되는 사실상의 ‘길거리 무규칙 격투’를 뜻한다.
문제는 이러한 거친 미디어 콘텐츠가 청소년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 놀이나 일종의 서열 정리 방식으로 둔갑했다는 점이다. 하교 후 공터나 아파트 지하 주차장, 인적이 드문 옥상 등에 모여 원형으로 둘러선 뒤, 두 사람을 안에 넣고 “야차룰 매치”라는 이름으로 싸움을 붙이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주변 학생들은 이를 말리기는커녕 스마트폰 카메라로 영상을 촬영하고, SNS나 단체 대화방에 공유하며 조회수와 ‘좋아요’를 즐기는 유희의 도구로 소비한다. 청소년기 특유의 인정 욕구와 폭력적 자극이 결합해 일탈이 ‘놀이 문화’로 정당화되는 순간이다.
“스파링 한번 뜰래?”... 법망 피하려는 악랄한 ‘합의 위장’ 수법
더욱 심각한 것은 이를 악용한 ‘합의형 강제 폭행’이다. 가해 학생들은 체격이 왜소하거나 거절하기 힘든 피해 학생을 표적으로 삼은 뒤, “남자답게 스파링 한판 하자”, “장난 삼아 몸 좀 풀자”며 싸움을 유도한다.
피해 학생 입장에서는 거절할 경우 따돌림을 당하거나 더 심한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 마지못해 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파링’이라는 간판이 무색하게, 현장에서는 체급 차이를 무시한 채 일방적인 무차별 폭행이 가해진다. 안와골절, 치아 파열, 뇌진탕 등 전치 수주에서 수개월에 이르는 중상해를 입히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가해 학생들은 사전에 “서로 때리기로 합의했다”는 모바일 메신저 대화나 피해자의 방어 동작을 유도해 ‘쌍방 폭행’ 구도를 만들어놓는다. 경찰 수사나 학폭위 조사에서 “서로 운동 삼아 스파링을 한 것일 뿐, 일방적 학폭이 아니다”라며 형사 처벌과 징계를 피하려는 치밀한 법망 회피 기술까지 공유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디어 알고리즘과 폭력 둔감증... 무너진 경계선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이 청소년들의 ‘폭력 둔감증’과 숏폼 미디어 알고리즘의 결합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한다.
유튜브, 틱톡, 인스타그램 등에서 자극적인 격투 콘텐츠가 수백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이 ‘강자’나 ‘멋진 캐릭터’로 선망받는 환경 속에서 폭력에 대한 죄책감이 마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범죄 행위가 ‘룰이 있는 스포츠’라는 핑계로 포장되면서, 피해자가 겪는 공포와 상처는 안중에도 없는 실정이다.
[진단과 대책] “합의는 면죄부 될 수 없다... 엄정한 사법 처리와 예방 교육 시급”
전문가들은 ‘스포츠’나 ‘합의’라는 탈을 쓴 신종 학폭에 대해 사법 당국과 교육계가 단호한 무관용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1. '위력에 의한 폭행' 명확한 판단 기준 확립: 피해자가 사실상 강요나 위력, 서열에 의해 동의했을 경우 이를 진정한 '합의'로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 특수폭행 및 중상해 혐의를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
2. 관람·촬영·유포자 ‘공범’ 처벌 강화: 현장에서 싸움을 부추기거나 영상을 촬영해 유포한 방조자들에게도 학폭위 징계는 물론 정보통신망법 위반 및 모욕·방조 혐의를 적극 검토해 ‘폭력 방관의 대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3. 미디어 리터러시 및 체육 윤리 교육 의무화: 격투기 체육관 및 학교 체육 수업을 중심으로 격투 기술은 철저한 보호장구와 룰, 지도자의 관리 감독 하에서만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치고, 폭력 콘텐츠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미디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4. 청소년 우범 지대 모니터링 확대: 주차장, 공터, 옥상 등 학생들이 모여 은밀하게 ‘스파링’을 진행하는 사각지대에 대한 CCTV 설치 확대와 학교전담경찰관(SPO) 및 자율방범대의 순찰 강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교육계 관계자는 “링 밖에서 글러브도 없이 벌어지는 폭력은 그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명백한 범죄일 뿐”이라며, “합의라는 이름 뒤에 숨은 잔혹한 강요를 학교와 사회가 조기에 간파하고 아이들을 지켜낼 수 있는 제도적 방어벽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