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 메모리 기업들이 세계 최대 금융 허브인 미국 자본시장으로 일제히 시선을 돌리고 있다.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와 함께 천문학적인 시설 투자 자금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국내외 주요 반도체 제조사들이 미국 증시를 통한 자금 조달에 사활을 거는 모양새다. SK하이닉스가 역대급 규모의 미국 금융시장 진출을 선언한 데 이어, 일본의 낸드플래시 거두인 키옥시아까지 미국 증시 상장 계획을 공식화하면서 동아시아 반도체 거인들의 뉴욕 대공습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이에 따라 시장의 눈동자는 자연스럽게 업계 1위인 삼성전자의 향후 행보로 쏠리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와 반도체 산업계에 따르면, 일본 낸드플래시 업계의 선두 주자인 키옥시아(구 도시바메모리)는 최근 개최된 주주총회를 통해 미국 자본시장 직행 티켓인 미국예탁증서(ADR) 발행 계획을 공식 선언했다. 가와무라 요시히코 키옥시아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주주들 앞에서 차기 회계연도 초입인 4월에서 6월 사이를 목표로 삼아 ADR 발행을 추진하겠다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했다. 그는 이번 프로젝트가 미국 금융시장과 회사를 직접 연결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확언하며, 반드시 성공적인 자금 조달을 완수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미국 자본시장과의 연결은 단순히 주가 안정성을 높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투자자들로부터 직접 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여기서 언급된 ADR은 외국 기업이 미국 정식 상장에 따른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현지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유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보증 증권의 일종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불과 하루 전 나스닥 시장으로의 진출을 선언한 대한민국 SK하이닉스의 행보와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전 세계 메모리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거물들이 약속이나 한 듯 글로벌 자금의 원천인 미국 투자자들을 선점하기 위해 속도전을 벌이는 양상이다.
특히 키옥시아의 이 같은 결단은 최근 AI 기술의 폭발적 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핵심 연산 장치에 필수적인 고대역폭메모리(HBM)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낮았던 낸드플래시 영역이 대전환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AI 모델의 연산 정밀도와 규모가 거대해질수록 처리해야 할 대규모 데이터를 안정적으로 저장할 공간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가공할 만한 속도로 증설되고 있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데이터센터가 대용량 저장장치를 대거 흡수하기 시작하면서 낸드플래시 수요가 가파르게 상승 곡선을 그리는 중이다. HBM의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이에 대한 보완재이자 필수재로서 고성능 eSSD를 비롯한 낸드 기반 저장장치로 시장의 온기가 급속히 확산되는 형국이다.
이러한 전방 산업의 호재에 힘입어 키옥시아는 올해 일본 증권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는 초대형 유망주로 우뚝 섰다. 주식시장에서 하루 만에 두 자릿수 이상의 폭등세를 기록하는가 하면, 연초 대비 주가 상승률이 무려 800%에 육박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러한 가파른 상승세 덕분에 일본 제조업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도요타자동차를 제치고 현지 시가총액 최상단에 이름을 올리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오타 히로오 키옥시아 최고경영자(CEO)는 북미 지역의 대형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사들과의 장기 공급 계약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추세라며, AI 인프라 확충에 따른 메모리 수요의 우상향 기조는 당분간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재미있는 점은 이 같은 일본 키옥시아의 질주가 한국의 SK하이닉스에게도 막대한 반사이익을 안겨준다는 사실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018년 글로벌 사모펀드인 베인캐피탈이 주도했던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에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했다. 당시 약 3조 9100억 원이라는 거금을 투입해 키옥시아 지분의 약 21%를 간접적으로 확보해 둔 상태다. 따라서 키옥시아가 미국 증시를 통해 몸값을 제대로 인정받고 자금을 조달할 경우, SK하이닉스가 보유한 지분 가치 역시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동반 상승하게 된다.
그러나 SK하이닉스는 단순히 투자 자산의 가치 상승만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들의 판을 직접 짜기 시작했다. 키옥시아보다 한발 앞서 미국 자본시장에서 약 45조 원 규모의 초대형 자금 조달 물꼬를 튼 것이다. 이사회를 통해 대규모 신주 발행을 동반한 제3자 배정 방식의 유상증자를 전격 결의하고 이를 시장에 공시했다. 예탁원에 신주를 맡기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 현지에서 DR을 발행해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에게 배정하는 치밀한 구조다. 나스닥 시장으로의 상장 예정일이 목전으로 다가온 가운데, 최종적인 발행 규모와 구체적인 공모 가격은 글로벌 큰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수요예측의 결과에 따라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이렇게 확보되는 천문학적인 자금은 한 푼도 빠짐없이 차세대 반도체 제조 시설 확충에 투입된다. 글로벌 AI 메모리 전쟁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고 독주 체제를 굳히기 위한 인프라 구축에 올인하겠다는 전략이다. 재원의 핵심 투자처는 대한민국 반도체의 미래 지도로 불리는 경기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1기 팹 건립에 집중된다. 아울러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P&T7 공장의 어드밴스드 후공정 패키징 라인 구축 및 관련 설비 도입, 그리고 초미세 공정의 절대적 필수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확보에 막대한 자금이 배정됐다. 구체적으로는 용인 기지에 31조 원 이상, 청주 후공정 기지에 19조 원가량이 책정됐으며, EUV 장비 도입에만 11조 원이 넘는 예산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 영업 활동으로 벌어들이는 현금에 더해 이번 미국 ADR 발행으로 확보한 달러 자금을 결합하여 글로벌 초격차를 완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의 대표 주자들이 미국 뉴욕의 자본을 흡수하며 덩치를 키우자, 서초동 삼성전자 서초사옥과 평택 캠퍼스에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국내 자본시장에만 머물러 있는 삼성전자 역시 글로벌 투자 접근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미국 ADR 상장 카드를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리서치 전문가는 최근 해외 주요 기관투자자들과의 연쇄 미팅 과정에서 삼성전자의 미국 증시 ADR 상장 가능성에 대한 문의와 관심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증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수많은 글로벌 펀드매니저들은 삼성전자가 미국 자본시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저평가 국면을 단숨에 해소할 강력한 주가 모멘텀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글로벌 자본의 유동성을 확보하는 능력이 곧 반도체 미세 공정과 생산 능력 싸움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현재의 우호적인 글로벌 금융 환경과 주가 밸류에이션을 고려할 때, 세계 최대의 반도체 제국인 삼성전자 역시 미국 자본시장 진출이라는 매력적인 옵션을 끝까지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아시아 반도체 벨트의 축이 뉴욕 금융시장과 결합하면서, 향후 글로벌 메모리 패권의 향방은 자본 조달의 속도와 규모에서 갈릴 전망이다.
차세대 AI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 싸움은 단순한 기술 격차를 넘어 '천문학적 자본을 얼마나 신속하게 조달하느냐'의 전쟁으로 진화했다. SK하이닉스와 키옥시아의 선제적인 미국 금융시장 공략은 글로벌 투자 접근성을 극대화하려는 고도의 전략적 포석이다. 경쟁사들의 달러 확보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삼성전자 역시 자본 효율성과 주가 부양을 위한 미국 ADR 상장 검토 압박을 크게 받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향후 반도체 산업의 거시적 재편을 이끄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