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승들은 보통 깨달은 선승(禪僧)을 찾아가 화두(話頭)를 하나 청해 받는 식으로 수행을 시작한단다. 화두 수행은 특정 질문에 대한 선사(禪師)들의 답을 바탕으로 “이 분이 어째서 이런 말을 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키워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만약 화두가 “이 뭣고”처럼 질문 형식으로만 돼 있다면, 그 질문을 붙잡고 계속해서 의문을 키워가면 된다. 수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화두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선사들의 대답은 마삼근(麻三斤)이다, 똥 묻은 막대기(幹屎槨)다, 앞니에 털이 났다(板齒生毛)는 식이고,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조주(祖主) 선사의 대답은 “없다(無)”이고, “부처나 조사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라(殺佛殺祖)”이다. 또 “달마 조사(祖師)가 동쪽에서 오신 까닭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가 무엇인가(是甚麽)?” 혹은 “이 몸이 최종적으로 돌아가는 곳은 어디인가?”이고, “선(善)도 악(惡)도 생각지 않았을 때 나의 본래 마음은 무엇인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은 무엇인가? 같은 황당한 반대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질문들을 줄여서 ”이 뭣고?“라고 한단다.
화두(話頭)수행에는 의정(擬晶)이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유지하거나 키워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간화선(看話禪)에서의 의문은 항상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잡념을 끊는 장치로 쓰인다. 화두(話頭)는 보통의 상식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답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순수하게 의문만을 키워 삼매경(三昧境, samadhi)에 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단다.
이렇게 화두는 의문을 기반으로 하는 수행인만큼, 퍼즐이나 큐브를 푸는 것보다 더욱 머리에 부담이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삼매경(三昧境)이 꾸준히 계속되면 자나 깨나 화두(話頭)가 마음속에 맴돌면서 내가 화두를 붙들고 있는 것인지, 화두가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된단다. 이런 식으로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생각이나 현상이 없어진 본래의 순수한 마음인 공(空)의 마음을 알게 되는데, 이를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견성(見性) 하는 순간에는 공통적으로 날카로운 칼날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내리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이는 마음속의 번뇌가 사라지면서 해탈을 향한 맑은 각성상태가 나타날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한번 나타난 각성상태는 그 상태로 사라지지 않은 채 앉으나 서나 누우나 계속해서 유지된다고 한다. 부처님은 이 견성(見性)에 이르기까지 6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일반인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최소한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한다.
견성(見性)을 하고 나면 앞에서 말한 화두에 대해서도 답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다만 지식으로 따져서 답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만큼이나 상식에서 벗어난 답이기 때문에 스님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선문답을 하고있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일반인으로서는 정신이 멍해지게 된단다. 깨달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고도의 맥락을 전제로 해서 대화가 오가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스님들은 상대방이 정말로 깨달았는지 깨달은 척하는 건지 상대의 선문답(禪門答)만 듣고도 바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단번에 깨달음을 얻어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면서 “더 닦을 게 남았다면 깨달은 게 아니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한 적이 있지만, 이는 “견성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견성했다고 주장하기 전에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성철 스님은 “진정한 보람은 완전히 견성하고 난 다음에 이뤄진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반면 간화선(看話禪)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일단 간화선이 석가모니의 수행법과 거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 중 대다수는 선종(禪宗) 자체가 초기 불교 이후 몇 백년 뒤에 일어난 대승 불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과 간화선 자체가 석가모니의 수행법이 아닌, 남북조 시대 조사선(祖師禪)의 전통에서 출발해 11세기 경, 체계적으로 정립된 수행 방법이라는 점을 근거로 든다.
문제는 간화선(看話禪)이든 조사선(祖師禪)이든 모두 일반인들이 수행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동시에 노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일반인들이 견성(見性)하기 위해 몇 달씩, 혹은 몇 년씩 수행에만 전념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교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종교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 반대로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계곡을 타고 흐르는 1급수 물처럼 깨끗한 종교인의 길을 제대로 가는 신앙으로 대접받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는 것과 깨닫는 것과의 차이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일반인은 아무래도 아는 것을 실천하는 데 만족해야만 할 것 같다.
-손 영일 컬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