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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흥렬 칼럼] 장마철, 그 값진 영광의 시절

곽흥렬

마침내 날이 들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려 온 파란 하늘인가. 근 한 달째 이어진 길고 지루한 장마에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가던 참이었다. 이젠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볼멘소리가 입 밖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었다. 

 

살아 있음이 눈물겹다는 표현이 정말 이럴 때 실감이 난다. 우리네 삶의 여정에서 이처럼 찬란한 순간이란 얼마나 자주 찾아와 줄 것인가. 그러기에 오늘같이 눈이 부시도록 쾌청한 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것도 어쩌면 인생을 낭비하는 짓이 되리라. 

 

이럴 때 가벼운 마음으로 즐겨 찾는 곳이 화원동산花園東山이다. 사는 데서 그리 멀지 아니한 곳에 아담한 소공원이 자리하고 있다는 게 여간한 축복이 아니다. 오랜만에 묵은 먼지를 털면서 산책을 나선다. 사뿐사뿐 내딛는 발걸음이 실로폰 소리처럼 경쾌하다. 속살거리듯 살갗을 쓰다듬으며 흐르는 실비단 바람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려진다. 

 

납작 숨죽이고 기다려 온 보람으로 모두들 생명의 찬가를 불러도 좋으리라. 이름 모를 새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포르릉포르릉 건너뛰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로 소프라노를 합창하고, 꽃사슴은 마냥 신이 나는 듯 겅중겅중 우리 안을 쫓아다닌다. 빠끔히 고개 내밀고서 대록대록 눈망울 굴리는 개구리의 모습이며, 연신 팔랑팔랑 날갯짓에 분주한 나비들의 움직임이 평화롭다. 이 여린 숨탄것들이 시련의 시절을 용케도 견뎌 내었다. 녀석들은 그동안 어디서 몸을 피하고 있다가 고맙게도 이렇게 다시 찾아와 준 것일까. 

 

햇볕은 가장 품질 좋은 거름이다. 이 천연의 비료는 공해가 없다. 그래서 환경을 오염시키지도 않는다. 연일 계속되던 비로 데친 나물처럼 흐늘흐늘하던 풀과 나무들이, 한 줌의 햇살에 생기를 얻는다. 물기 머금은 줄기와 잎사귀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다. 다들 환희에 들뜬 표정이다. 다시 맞은 광명한 새날을 자축하는 뭇 생명체의 흥에 겨운 몸짓으로, 우후雨後의 공원에는 한바탕 축제 분위기가 연출된다. 

 

초목 금수가 하나같이 장마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우산도 없이, 쏟아져 내리는 장대비를 무대책으로 맞고 선 모습이 과객처럼 처량해 보여 안쓰러웠었다. 처음에는 목마른 대지를 적셔 주던 감로甘露 같은 빗줄기가 아니던가. 그 생명의 젖줄이, 이제는 거꾸로 생명을 위협하는 폭군이 되어 목숨 가진 것들을 괴롭혔었다. 속담에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고 했다. 그만큼 장마는 우리를 힘들고 지치도록 만들었다. 세상 그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면 결국 탈이 되고 만다는 절대의 이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혹간 비가 오는 날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참 안된 양반들이구나 싶은 주제넘은 노파심이 고개를 들곤 한다.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육신에 고혈압 같은 지병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험구하려고 까닭 없이 얽어 짜낸 허튼소리가 아니다. 충분히 수긍이 갈 만한 과학적 근거를 들이댈 수 있으니 감히 자신하게 되는 이야기다. 

 

기상 개황 상으로 들여다보면, 항시 대기가 저기압일 때 비가 몰려오게 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대우주의 엄숙한 질서이며 법칙이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은 기압이 낮고, 기압이 낮은 날은 육신을 내리누르는 압력도 떨어진다. 이럴 때, 평소 고혈압인 사람은 오히려 정상치 혈압에 가까워지게 된다. 그렇다 보니 자연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뜨는 날이면, 나는 으레 몸이 찌뿌드드하고 맥이 풀린다. 그러면서 마음까지 덩달아 울적해 온다. 게다가 장마철에는 그런 기분이 더욱 깊어진다. 비록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칙칙하고 음습한 분위기가 심신을 잔뜩 가라앉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네 삶이라는 게 어쩌면 이 장마철 같은 것은 아닐까. 지겹도록 흐리고 비가 오다가도, 이따금씩 파란 하늘 드러내는 즐거운 순간이 찾아든다. 그 한순간의 샘물 같은 기쁨을 위해 지루하게 이어지는 장마철을 묵묵히 참고 견뎌 나가야만 한다. 기다림이 길었기에 기쁨은 오히려 배가 된다. 노상 쨍쨍 맑을 수야 없지 않은가. 설사 늘 맑은 날만 계속된다 해도, 우리는 그 변화 없는 따분한 일상에 외려 질식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강렬한 태양이 눈이 부셔서 충동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마는, 소설『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사람은 한 번씩 앓아누워 봐야 평소 잊고 지내던 건강의 소중함을 새삼 되새기게 되는 법. 장마철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통과 시련의 기간이 아닌가. 그것이, 이겨 낸 자에게 주어지는 값진 영광의 시절임을 항시 보내고 난 뒤면 그때서야 깨치곤 한다. 해마다 장마철을 맞을 때마다 받게 되는 보약 같은 가르침이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김규련수필문학상

이메일 kwak-pogok@hanmail.net

 

작성 2025.06.23 10:49 수정 2025.06.2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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