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다 5월 5일 밤이 깊어지면, 튀르키예 아나톨리아의 들판과 발칸의 언덕 위에서는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종이 위에 소망을 적어 장미나무 가지에 매단다. 가슴속 가장 깊은 욕망 — 집, 아이, 건강, 사랑 — 을 한 줄의 글씨로 눌러 담아 나무에 맡긴다. 불 위를 뛰어넘으며 묵은 슬픔을 태워 보내고, 새벽빛이 스미기 전에 일어나 흰옷을 입고 풀밭을 걷는다. 이 모든 의식의 이름은 '흐드렐레즈(HIDIRELLEZ)'다.
흐드렐레즈는 단순한 계절 축제가 아니다.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신학이자 우주론이다. '히드르(Hızır)'와 '일야스(İlyas)'라는 두 이름이 합쳐져 탄생한 이 단어 안에는,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발칸 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문명권이 수천 년 동안 공유해온 믿음의 지층이 겹겹이 쌓여 있다. 이슬람 전통에서 히드르는 지상에서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고 대지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불멸의 존재로 여겨진다. 이슬람 전승에는 일야스, 즉, 엘리야는 바다를 다스리는 예언자로서 물과 생명을 수호하는 신성한 역할을 맡는다. 이 두 존재가 일 년에 단 한 번, 바로 이 무렵 밤에 지상 어딘가의 장미나무 아래에서 만난다는 것이 흐드렐레즈 신앙의 핵심이다.
참고로, 또 하나의 축제, '네브루즈'는 보통 춘분 무렵의 새해·봄맞이 축제이고, ‘흐드렐레즈’는 5월 초의 봄·풍요 기원 축제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이다. 둘 다 봄과 새출발을 기념하지만, 시기와 상징이 다르다. 핵심 차이는 네브루즈는 대체로 3월 21일 전후, 흐드렐레즈는 5월 5~6일 무렵이다. 네브루즈는 새해와 자연의 부활, 흐드렐레즈는 이슬람 경전의 뿌리를 가진 동시에, 튀르키예·수피·민간신앙이 덧입혀진 신비한 영적 스승이자 구원자 이미지의 인물로 알려진 흐즈르와 엘리아가 합쳐진 이름으로 소원 성취, 건강과 풍요를 강조한다.
지역적으로 보면, 네브루즈는 이란권·중앙아시아·쿠르드·튀르크 문화권 등에서 넓게 퍼져 있고, 흐드렐레스는 튀르키예와 발칸 지역의 민속 전통으로 알려져 있다. 당일 행사로는 네브루즈는 새해 축제로서의 성격이 강하고, 흐드렐레즈는 소원 빌기, 불 넘기기, 물·초목과 관련된 민속 의례가 두드러진다. 다시 말하면, 네브루즈는 봄의 시작을 여는 새해 축제, 흐드렐레즈는 봄이 무르익는 시점의 소원·풍요 축제이다.
비교 종교학적 시선으로 이 전통을 바라볼 때 흥미로운 지점이 드러난다. 히드르는 이슬람 전통에서 쿠란 18장(알-카흐프) 속 수수께끼 같은 인물 '알-히드르'와 동일시된다. 무사(모세)와 함께 등장하는 이 인물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신성한 지혜를 체현한다. 한편, 일야스,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맞선 인물로,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모두가 공유하는 예언자다. 서로 다른 신앙의 강줄기가 하나의 장미나무 아래로 흘러들어 만나는 셈이다. 흐드렐레즈는 그 교차점에서 피어난 꽃이다.
2026년 흐드렐레즈는 5월 5일 저녁부터 시작되어 6일 새벽까지 이어진다. 튀르키예 전역과 발칸 지역 국가들에서 오늘 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같은 의식을 치른다. 장미나무 의식이 가장 널리 알려진 전통이다. 바라는 것의 작은 형상이나 그림을 나무 아래 묻거나 가지에 매달고, 이튿날 새벽 그것을 꺼내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낸다. 소망이 자연의 순환 속으로 스며들어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갑 의식도 빠질 수 없다. 풍요가 집 안에 머물기를 바라며 지갑의 입구를 열어두고, 곡식 자루와 밀가루 포대의 묶음도 풀어놓는다. 어떤 지역에서는 장미나무 아래 동전을 놓아두었다가 이튿날 '풍요의 돈'으로 간직하며 일 년 내내 쓰지 않는다고 한다.
불 위를 뛰어넘는 의식은 흐드렐레즈의 절정이다. 세 번 불 위를 넘으며 몸과 마음에 깃든 묵은 기운을 털어낸다고 믿는다. 액운이 불꽃 속에 타버린다는 상징적 정화 의식이다. 유네스코는 이 풍습의 깊이와 광범위한 문화적 공유를 인정하여 흐드렐레즈를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했다. 한 전통이 국경과 종교를 넘어 수천 년을 살아남아 유네스코의 이름으로 보호받는다는 사실은, 인간이 봄을 맞이하는 방식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절실한지를 말해준다. 6월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흰옷을 입고 들판과 초원을 걷는 풍습도 이어진다. 새해 같은 봄의 시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