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의 문장이 두 문명과 두 신앙을 갈라놓았다.
어떤 문장은 단순한 글자의 배열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다. 성경의 첫 문장,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깊이 사유되어 온 단 하나의 문장이다. 그 짧은 문장 속에 시간의 기원이 있고, 공간의 탄생이 있으며, 존재 자체의 이유가 숨어 있다.
그런데, 이 문장으로부터 약 2,600년 뒤, 아라비아반도의 한 동굴에서 이른바, 또 다른 계시가 울려 퍼졌다. 꾸란은 이렇게 시작한다. “비스밀라히 라흐마니 라힘(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두 거대한 문명이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땅 위에서 그러나 놀랍도록 유사한 질문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 시작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무엇인가.
나는 오랜 기간 이 두 문장을 손에 들고 중동 지역을 돌아다녔다. 중동의 먼지바람 속에서, 어느 도시의 새벽 아잔 소리를 들으며, 혹은, 에덴동산의 땅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과 물 심판으로 인류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노아의 방주가 내렸던 아라라트산 지역을 돌면서 매번 같은 감동과 같은 경이로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렇다면, 이 두 전통은 얼마나 닮아 있으며, 또 얼마나 근본적으로 다른가?
베레쉬트: 시간 이전의 시간
창세기 1장 1절의 첫 단어는 히브리어로 '베레쉬트'다. 문자적으로는 '태초에', '시작 속에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유대 랍비 전통과 기독교 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단어 하나에 광대한 신학적 바다가 담겨 있다고 주장해 왔다.
'베레쉬트'는 시간의 탄생을 선언한다. 시간 이전에는 창조주만 존재했으며, 창조 행위 자체가 시간의 출발점이 된다. 기독교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시간 속에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창조하셨다"라고 말했다. 즉, 성경 창세기 1장 1절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존재론적 선언이다. 창조주가 먼저 있었고, 그의 의지로 시간이 열렸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엘로힘'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가 문법적으로 복수형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뒤따르는 동사 ‘바라(창조하다)’는 단수형으로 쓰인다. 이 문법적 긴장은 절대 오류가 아니다. 기독교는 이 안에서 삼위일체의 씨앗을 읽는다. 창조주는 하나이되, 그 본질 안에 완전하고 풍성한 관계성이 내재한다. 성부께서 말씀하시고, 성자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며(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성령께서 수면 위를 운행하신다(창세기 1:2). 창조는 하나의 신성한 협주곡이다.

꾸란이 말하는 창조: 알라의 단일한 명령
꾸란은 세상의 창조에 관해 여러 곳에 걸쳐 묘사한다. 성경의 창세기 1장 1절과 관련해서 꾸란의 유사한 구절들은 여러 군데 찾아볼 수 있으며, 그중 꾸란 7장 54절은 그 대표적인 구절이다. “진실로 너희의 주님은 알라시니, 그분은 하늘과 땅을 엿새 만에 창조하시고, 그 후 보좌 위에 자리하셨다”. 이 외에도 꾸란 21장 30절은 창세기와의 직접적인 대화를 가능케 하는 구절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하늘과 땅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음을 알지 못하는가. 신은 그것들을 갈라놓았으며, 물로부터 모든 살아있는 것을 만들었노라.” 이 구절은 현대 우주론의 빅뱅 이론과 놀라운 공명을 이룬다는 점에서 이슬람 학자들에게 자주 인용된다.
한편, 이슬람의 창조 신학에서 핵심은 꾸란 36장 82절에서 “있으라, 그러면 있게 되느니라”(Be, and it is)라는 알라의 명령어다. 성경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어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난 것과 구조적으로 정확히 일치한다. 두 전통 모두, 창조를 가리켜 신의 말씀, 즉, 신의 명령과 의지의 직접적인 산물로 이해한다. 이 세상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맹목적인 물질적 과정의 결과도 아니다. 세상은 인격적 존재의 의도적 행위로 탄생했다.
이슬람에서 '알라(Allah)'라는 단어 자체를 분석해 보면, 아랍어 '알-일라흐(Al-Ilah)', 즉, '그 신(The God)'에서 파생된 것으로, 정관사 '알(Al)'이 포함된 단일 신격을 지시하는 고유명사다. 이는 히브리어 '엘' 혹은, '엘로힘'과 어원적으로 동일한 셈어 계통의 뿌리를 공유한다. 두 전통이 동일한 언어적 뿌리에서 자신들의 신을 불렀다는 사실은, 단순한 언어학적 우연이 아니라, 아브라함적(Abrahamic) 신앙의 공통된 기원을 가리키는 역사적 증거다.
두 신앙의 유비 지점: 두 전통이 만나는 신학적 교차로
창세기 1장 1절과 이슬람의 창조 신학이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명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무로부터의 창조’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이 기존에 존재하는 어떤 재료도 없이, 오직 신의 의지와 말씀만으로 우주를 존재케 하셨다고 가르친다. 이슬람 역시 알라가 어떤 선재(先在) 하는 물질이나 보조자 없이 홀로 창조의 주체이심을 강조한다. 꾸란 112장은 이를 선명하게 선언한다. "말하라, 그분은 알라이시니, 하나이시다. 알라는 절대적으로 영원하시다. 그는 낳지 아니하셨고, 낳아지지도 아니하셨다. 그리고 그와 동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창세기의 '엘로힘'이 단수의 행동을 하는 복수형 명사라면, 이슬람의 알라는 어떠한 복수성도 철저히 배제하는 단일 인격이다. 여기서 두 전통의 가장 근본적인 갈림길이 나타난다. 기독교는 창조주의 단일성 안에 관계성(삼위일체)을 고백하지만, 이슬람은 그 어떤 신적 분리나 내적 관계성도 '쉬르크(신에 대한 동반자를 설정하는 행위)'로 규정하여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차이를 넘어 두 전통이 공명하는 또 하나의 지점이 있다. 그것은 창조의 목적론이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단계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평가를 반복하고 있다. 창조는 선하고, 아름다우며,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꾸란 역시 67장 2절에서 “그분은 죽음과 생명을 창조하셨으니, 이는 너희 중 누가 행실이 가장 좋은지를 시험하기 위함이라”라고 선언한다. 두 전통 모두 창조된 세계는 의미 없는 우연이 아니며, 창조주의 선하심과 목적 안에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요한복음 1장 1절과의 삼각 구도
창세기 1장 1절의 신학적 지평을 더욱 넓히려면, 요한복음 1장 1절을 함께 읽어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창세기의 첫 단어 ‘태초에’를 그대로 가져온다. 그리스어 ‘로고스(Logos)’는 단순한 언어적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이성적 원리이자,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의 인격적 표현이다. 기독교는 이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몸을 입었다고 고백한다(요한복음 1:14).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이 교리를 절대 수용하지 않는다. 이슬람의 예수(이싸)는 선지자이자, 알라의 말씀으로 태어난 탁월한 인물이기는 하지만(꾸란 4:171, “알라의 사도이자 그분의 말씀이니”), 그는 알라와 절대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이슬람은 꾸란이 알라의 말씀이, 지면 위에 기록된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한 인간의 삶 속에 완전히 거하셨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두 거대 신앙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깊고 결정적인 신학적 차이이다.
그러나, 이 차이를 섣불리 적대적 단절로 읽어서는 안 된다. 꾸란 4:171에서 꾸란 자체가 예수(이싸)를 “알라의 말씀”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두 전통이 예수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기독교가 로고스 신학을 통해 창세기 1장 1절을 창조의 매개자인 그리스도와 연결할 때, 이슬람은 그 동일한 ‘말씀’의 개념을 꾸란 계시와 예수의 특별한 탄생에 적용한다. 이 공통된 개념적 자원은, 두 전통 간의 진지한 신학적 대화를 위한 가장 비옥한 토양이다.
두 첫 문장이 인류에게 건네는 초대
창세기 1장 1절과 꾸란의 바스말라(Basmala) - 이 두 개의 위대한 첫 문장은 수십억 명의 인간에게 하루를 시작하게 하고, 삶의 의미를 묻게 하며,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어왔다. 기독교인은 아침마다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로 자신을 세우며, 무슬림은 모든 행동의 시작에 “비스밀라”를 읊으며, 그 행위를 알라의 이름으로 봉헌한다. 비록 형식은 다르지만, 그 방향은 같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인간은 혼자가 아니며, 이 세계는 우연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비교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세 아브라함 종교가 공유하는 가장 깊은 신학적 공통 분모를 언급하면서, “신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으로 세상이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요약한 바가 있다. 유대교의 토라, 기독교의 성경, 이슬람의 꾸란 - 이 세 텍스트 모두, 신의 말씀이 물질세계와 인간 역사 속으로 깊이 들어온다는 신념을 그 중심에 놓는다. 여기에서 창세기 1장 1절은 그 ‘들어옴’의 가장 원초적인 선언이다.
태초 앞에 선, 한 인간의 묵상
중동을 끊임없이 연구해 온 자로서,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단 한 번도 내 자리를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창세기 1장 1절을 다시 펼칠 때마다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문장은 내게 늘 그렇게 말을 건네온다. “너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있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도 사랑이 있었고, 네가 사라진 뒤에도 그 사랑은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무슬림 형제들이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비스밀라히 라흐마니 라힘”을 읊을 때, 그 소리 안에서 나는 낯선 종교의 신음이 아니라, 동일한 창조주를 향한 또 하나의 갈급한 목마름을 듣는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데 너무 많은 세월을 소비해 왔다. 그러나 두 전통의 가장 깊은 첫 문장들은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오직 그 문장들은 위에 있는 그분을 가리킨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그건 내 신앙의 심장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심장이 뛰는 한, 나는 무슬림 형제들과 함께 이 하나의 질문 앞에 서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 태초의 존재는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무엇을 요청하는가?”
창세기 1장 1절은 대답이기 이전에 초대장이다. 그 초대는 기독교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무슬림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 숨 쉬는 모든 생명을 향한 창조주의 첫 번째 ‘말’ 걸음이다. 나는 오늘도 그 ‘말’ 걸음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