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하게 묻겠다. 만약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한 청년이 공개처형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서 걸어 나왔다면, 그 사실이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는 사건이라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대담하고 가장 검증이 가능한 주장, 즉, '나사렛의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다'라는 선언에 관한 이야기다.
법정에서도 통하는 증거들
역사학자들조차 부인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예수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명령 아래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문헌만의 기록이 아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 『연대기』에서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되었다"라고 기록한다.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역시 예수의 처형과 그 이후 제자들이 부활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적대적 증인들마저 처형의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무덤이 비어 있었다
이것이 핵심이다. 로마 당국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의 시신을 제시하면 이 부활 논란은 단 하루 만에 종결될 수 있었다. 그들은 왜 시신을 내놓지 못했는가. 마태복음 28장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 병사들에게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라는 거짓말을 퍼뜨리도록 돈을 주었다. 빈 무덤 자체를 부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들의 반론조차 역설적으로 빈 무덤을 증명한다.
500명의 목격자, 그리고 순교를 선택한 사람들
부활 이후 예수를 목격한 증인들의 목록은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열두 제자에게, 그리고 한꺼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기록하면서 "그중 대다수가 지금도 살아 있다"라고 덧붙인다. 이것은 기원후 55년경, 즉, 사건 발생 20여 년 후에 쓰인 글이다. 목격자들이 생존해 있던 시대에 공개적으로 반박이 가능한 주장을 한 것이다.
더욱 강력한 증거는 제자들의 선택이다. 열두 제자 중 열한 명은 부활을 증언하다가 순교했다. 인간은 자신이 지어낸 거짓말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사람은 이익을 위해 거짓을 말하지만, 아무 이득도 없이, 오히려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도 같은 증언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것은 다르다.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면서도 부활을 철회하지 않았다. 기독교 박해의 선봉장이었던 사울이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이 되어 전 생애를 사슬과 채찍 속에서 보냈다. 이 사람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었는가.
꾸란이 말하는 이싸(예수), 그가 특별한 이유
여기서 무슬림 형제자매들에게 직접 묻고 싶다. 꾸란은 예수(이싸)를 단순한 예언자로 기록하지 않는다. 꾸란 3장 45절은 이싸를 '알-마시흐(Al-Masih)', 즉, 메시아라 부른다. 꾸란 4장 171절은 그를 '알라의 말씀(Kalimatullah)'이라 칭한다. 꾸란 19장(마리얌 장)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상세히 기록하고, 3장 49절은 그가 시각장애인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다고 증언한다. 이슬람이 인정하는 모든 예언자 중에서 이런 칭호와 기적이 동시에 주어진 인물은 오직 ‘이싸’ 한 명뿐이다.
예수(이싸)의 죽음에 대해 꾸란 4장 157절은 "그들은 그를 죽이지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다"라고 말한다. 많은 무슬림 학자는 바로 꾸란의 이 구절을 통해 알라가 이싸(예수)를 죽음에서 구출했다고 해석한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이싸(예수)가 죽음을 통과하지 않았다면, 그는 단지 위기에서 구출된 예언자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실제로 죽음을 맞이하고, 그것을 이겼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건이 된다. 꾸란 19장 33절에서 이싸(예수)는 "나에게 평화가 있으리니, 내가 태어나는 날에도, 내가 죽는 날에도, 그리고 내가 살아서 일으켜지는 날에도."라고 지접 말한다.
살아서 일으켜지는 날. 이싸(예수) 스스로 꾸란 안에서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세상의 모든 저울은 무너진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전제 위에 서면, 그다음은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의 문제다. 모든 인류는 어떤 형태로든 '심판'의 개념을 갖고 있다. 이슬람의 미잔(저울), 힌두교의 카르마, 불교의 업(業), 세속주의의 양심.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 어떤 체계도 '이미 치러진 죗값'을 말하지 않는다. 모든 체계는 인간에게 더 잘하라고, 더 노력하라고, 더 많이 쌓으라고 요구한다. 저울은 언제나 흔들린다. 확신은 오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은 선포한다. 빈 무덤 앞에서 이것은 끝났다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이 저울 앞에서 영원히 발버둥 치는 드라마의 종막(終幕)이다. 더 이상 쌓을 필요가 없다. 이미 채워졌다.
이 4월의 아침, 나는 다시 무릎을 꿇는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몇 번이나 멈췄다. 무슬림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동의 한 골목에서 함께 차를 마시던 그 사람들, 라마단 내내 단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으며 신의 자비를 구하던 그 형제들. 그들의 눈빛 속에 있던 두려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들은 “나는 충분한가? 오늘도 나는 무엇이 부족한가?”라고 끝없이 되새기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많은 수행(실천)이 아니었다. 그는 저울 앞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었다.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 해방은 이미 2,000년 전에 선언되었다. 빈 무덤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이 단순하고도 압도적인 사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예수는 이 세상의 역사 가운데 유일하게 죽음을 이긴 사람이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있다.
당신은 이 모든 주장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외면하겠는가? 아니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마주하겠는가? 물론, 그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의 몫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상 이렇게까지 구체적이고, 이렇게까지 많은 증인이 있으며, 이렇게까지 적대적 증인들조차 반박에 실패한 사건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예수의 빈 무덤이 많은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