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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인문학9] 명아주 지팡이를 짚던 노인이 들려준 흙의 맛

잡초라 불리던 청년기가 지나고 누군가의 뼈가 되어주는 노년의 식물

가볍고 단단한 명아주 대가 증명하는 '시간'이라는 가장 정교한 가공법

식물치유사가 읽어낸 쓸모없는 존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의 반전

장수 지팡이가 되는 명아주(출처=국립중앙과학관)

 

 

"당신은 쓸모없다고 여겨 뽑아버린 것들, 훗날 당신을 지탱할 유일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음을 믿는가?"

정원사들에게 명아주(Chenopodium album)는 골칫덩이다. 비옥한 땅을 만나면 사람 키보다 높게 자라며 정원의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거추장스러운 풀이 가을을 지나 바짝 마르면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단단한 지팡이인 '청려장(靑藜杖)'으로 탈바꿈한다. 

 

고대부터 왕이 노인들에게 하사했다는 이 지팡이는 화려한 목재가 아니라 길가에 흔히 널린 풀을 말려 만든 것이다. 흙의 영양분을 빨아먹기만 한다며 타박받던 잡초가 결국 인간의 무너지는 몸을 가장 정직하게 받쳐주는 성자로 부활하는 셈이다.

 

 

지팡이가 되기 위한 예비군
명아주가 잡초들 사이에서 유독 높이 솟구치는 이유는 햇빛을 향한 갈망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갈망은 줄기 안에 촘촘한 섬유질을 축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정원사는 그 높이를 '방해'라고 부르지만 식물은 그것을 '강화'라고 부른다. 명아주는 자라면서 줄기 내부를 가벼운 공기층과 단단한 벽으로 채운다. 가벼우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역학적 구조는 긴 세월 바람과 싸우며 스스로를 단련한 야생의 결과물이다.

 

 

 

 

흙의 맛을 기억하는 뿌리 : 노년의 깊이
명아주 지팡이를 짚는 노인들은 말한다. 지팡이 끝을 통해 땅의 진동과 흙의 상태가 손바닥으로 전해진다고. 명아주는 자라는 동안 땅속 깊은 곳의 미네랄을 흡수하여 줄기에 새긴다. 가공된 플라스틱이나 금속 지팡이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흙의 기억'이 줄기 마디마디에 박혀 있다. 이는 치유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인위적인 도구가 아닌 자연의 생애를 온전히 마친 존재를 통해 대지와 연결되는 감각은 노년의 고립감을 해소하는 강력한 매개체가 된다.

 

 

청려장의 인문학 : 가벼움 속에 담긴 무게
명아주 지팡이가 귀하게 대접받는 이유는 그 '가벼움'에 있다. 기력이 쇠한 노인에게 무거운 나무 지팡이는 오히려 짐이다. 명아주는 자신의 속을 비워 가벼워졌으나 겉은 강철처럼 단단하게 굳혔다. 이는 '비움으로써 강해지는' 동양적 지혜와 맞닿아 있다. 식물치유사는 이 지팡이를 보며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조언한다. 화려한 외형을 쟁취하기보다 내면을 비우고 본질을 단단히 하는 것이 진정한 품격임을 말이다.

 

 

정원사의 참회 : 뽑을 것인가 키울 것인가
정원사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보기 싫다고 명아주를 어린 싹일 때 뽑아버릴 것인지 아니면 훗날 누군가의 고귀한 지팡이가 될 미래를 위해 정원 한구석을 내어줄 것인지. 잡초와 약초 혹은 가치 있는 목재의 구분은 식물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원사의 안목이 결정한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완성된 시점'이 다르다. 지금 당장 꽃을 피우지 않는다고 해서 그 생애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흙으로 돌아가기 전의 마지막 헌신
명아주는 지팡이로서 소임을 다한 뒤에도 썩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을 돕고 다시 대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이 선순환은 야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마침표다. 명아주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걸음마다 흙의 맛이 배어나는 이유는 그 지팡이가 곧 대지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흔한 풀꽃의 끝이 이토록 장엄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의 흔한 순간들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지탱하는 단단한 지팡이가 되지 않겠는가.
 

작성 2026.04.04 11:42 수정 2026.04.0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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