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나라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사랑을 노래하되 결코 가볍게 '사랑'이라 발음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스스로를 태워 없애는 존재들을 무대 위로 불러낸다. 봄누에와 촛불이다.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 뽑기를 멈추고, 촛불은 재가 되어서야 눈물이 마른다(春蠶到死絲方盡, 蠟炬成灰淚始乾)." 이 비장한 결사(結辭)의 문장 앞에서 사랑은 더 이상 달콤한 감정이 아니라, 가혹한 운명의 다른 이름이 된다.
생존이 아닌 완성, 소모의 미학
봄누에에게 실을 뽑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방편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 자체를 밖으로 꺼내어 놓는 일이며, 육신을 비워내는 고통스러운 소모다. 촛불 역시 마찬가지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지만, 빛을 내는 순간부터 자신의 몸을 깎아내려야만 한다. 그가 흘리는 촛농(눈물)은 빛의 대가이자, 존재가 소멸해간다는 증거다.
이 장면에 이르면 사랑은 어떤 ‘태도’를 넘어 ‘상태’가 된다. 살아 있는 한 멈출 수 없고, 멈추는 순간 이미 사랑이 아니게 되는 상태. 이상은이 보여주는 것은 사랑의 화려한 시작(始作)이 아니라, 처절한 끝(終)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끝이 없는 끝’이다. 사랑이란 인위적으로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 태워버려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자연히 연소(燃燒)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궁진췌(鞠躬盡瘁), 몸을 굽혀 힘을 다하는 마음.
여기서 우리는 제갈량의 유명한 출사표 구절,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를 떠올리게 된다. 몸을 굽혀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鞠躬盡瘁),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멈추겠다(死而後已)는 맹세. 한 나라를 향한 충절의 언어가 어째서 사랑의 고백과 이토록 닮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 마음 모두 ‘끝내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끝낼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 고백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사랑 또한 그 대상 앞에서 기꺼이 몸을 굽히는 일이며, 자신의 명(命)이 다할 때까지 스스로를 남김없이 써버리는 일이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결심의 영역이 아닌 ‘체질’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상태, 그래서 떠나지 못하고 끊어내지 못한 채 결국 자신을 온전히 소모하고 마는 운명 말이다.
가벼운 사랑의 시대, 우리는 견딜 수 있는가
오늘날의 사랑은 이상은(李商隱)의 시구보다 훨씬 가볍고 빠르다. 현대의 우리는 상처 입기 전에 현명하게 물러설 줄 알고, 심지가 다 타버리기 전에 불을 끄는 법을 배운다. 효율과 가성비가 지배하는 시대에 자신을 다 써버리는 '국궁진췌(鞠躬盡瘁)'의 사랑은 어쩌면 미련하거나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효율적인 연애가 결코 줄 수 없는 근원적인 울림이 여전히 그 시의 두 줄 속에 살아 숨 쉰다. "죽어서야 실을 다하고, 재가 되어야 눈물이 마른다"는 구절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면서도 가장 정직한 사랑의 명세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런 사랑이 예고 없이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도망치지 않고 나를 소모하며 끝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자신을 다 녹여낸 뒤에야 멈추는 그 눈물, 이 지독하고도 투명한 진심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망설이며 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