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마 침략 이후의 류큐 왕국은 겉으로는 국가의 틀을 유지했으나, 그 내부에서는 기층민의 삶이 급속히 무너져 내렸던 시기이다. 왕부는 사쓰마 번에 바쳐야 하는 연공과 책봉사 접대비, 에도 상경 경비 등 막대한 지출을 감당하지 못한 채 만성적 재정 파탄에 빠졌고, 그 부담은 가장 약한 계층인 농민들에게 집중적으로 전가되었다.

이 과정에서 농촌 사회는 연쇄적으로 붕괴하였다. 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가족이 흩어지는 ‘가내도래(家内倒れ, 치네도리)’에 내몰렸다. 문제는 개인 단위의 파산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금이 공동체 단위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한 집안의 몰락은 곧 납세 공동체인 ‘여(与, 쿠미)’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른바 ‘여도래(与倒れ, 쿠미도래)’는 류큐 농촌이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내몰렸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현상이었다.
자연재해는 이 비극을 더욱 심화시켰다. 류큐는 태풍과 가뭄이 잦은 환경에 놓여 있었고, 1605년 고구마가 도입된 뒤에도 반복되는 대기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18세기 중반 이후의 극심한 기근 속에서 농민들은 마지막 생존 수단으로 소철(蘇鉄)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소철은 맹독성을 지닌 식물로, 독소 제거 과정이 조금만 어긋나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식재였다.
그럼에도 왕부가 직접 독소 처리법을 지도하고 재배를 장려했다는 사실은 당시 식량난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빈곤은 인간 존엄마저 무너뜨렸다. 무거운 세금을 견디기 위해 부모가 자식을 츠지 유곽 등에 창기로 파는 인신매매가 만성적으로 이어졌고, 생존은 더 이상 공동체의 보호가 아니라 희생의 구조 속에서 겨우 유지되는 일이 되었다. 류큐 사회의 하층민에게 삶은 생활이 아니라 버티기 그 자체였던 셈이다.
이러한 파탄은 사키시마(先島) 제도에서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미야코(宮古)와 야에야마(八重山)에는 토지 면적과 무관하게 사람 수대로 세금을 매기는 인두세(人頭税)가 부과되었다. 15세부터 50세까지의 모든 남녀가 과세 대상이 되었고, 남성은 좁쌀과 쌀, 여성은 직물로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여기에 지방 관리들의 중간 착취와 부정이 겹치면서 주민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인구가 늘수록 세금 부담이 커지는 구조는 결국 영아 살해(間引き)라는 참혹한 선택으로 이어졌고, 이 풍습은 야에야마 지역에서 메이지 시대까지 지속되었다고 서술된다.
1771년 4월 발생한 메이시대의 큰 해일(明和の大津波)은 이 절망 위에 또 하나의 재앙이었다. 해저 화산 폭발로 인한 거대한 쓰나미는 사키시마 제도를 휩쓸었고, 야에야마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에 이르는 9,313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그러나 왕부는 재난 구호보다 징수를 앞세웠다. 사망자의 몫까지 생존자에게 인두세로 부과한 조치는, 재난 이후의 행정이 보호가 아니라 수탈의 연장이었음을 드러낸다. 그 결과 야에야마의 인구는 장기적으로 급감하였고, 왕국 말기에 이르러서는 쓰나미 이전의 3분의 1 수준까지 축소되며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양 이양선(異国船)이 빈번히 류큐 연안에 출몰하자, 류큐 당국은 이들을 조기에 퇴거시키기 위해 식량, 땔감, 식수, 일용품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유화책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 무상 원조는 이미 고갈된 왕부 재정을 더욱 압박했고, 그 부담은 다시 내부 민생으로 되돌아갔다.
결국 사쓰마 지배 이후의 류큐 왕국은 외형상 체제를 유지했을지라도, 그 실질은 기층민의 희생 위에 버티는 구조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조세 전가가 농촌 경제를 무너뜨렸고, 기근은 소철 식용이라는 위험한 생존 방식으로 이어졌으며, 사키시마에서는 인두세와 명화 대일해가 중첩되며 삶의 기반 자체가 파괴되었다. 류큐 왕국 내부의 민생사는 곧 국가 재정 파탄이 어떻게 사회적 참상으로 전이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의 기록이다.
류큐 왕국 내부의 파탄은 어느 한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조세 전가, 자연재해, 식민지적 수탈, 외세 대응 비용이 겹겹이 누적된 결과이다. 그 끝에서 가장 큰 대가를 치른 이들은 왕부가 아니라 하층 농민과 사키시마 주민들이었다는 점이 이 서술의 핵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