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의 떡과 순교의 피가 교차하는 2026년 봄, 중동의 화약고가 던진 영성적 질문
2026년 4월의 중동은 인간의 달력이 아닌 ‘신의 달력’이 충돌하는 기이하고도 비극적인 전장이 되었다. 한쪽에서는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자유와 구원을 노래하며 누룩 없는 빵을 떼고, 다른 한쪽에서는 불의한 칼날에 쓰러진 성자의 고통을 기억하며 가슴을 친다.
이스라엘의 무교절(Passover)과 이란의 아야메 샤하다트(Ayam-e-Shahadat)가 겹친 이 잔인한 봄, 예루살렘과 테헤란의 하늘은 축제의 폭죽 대신 서로를 향한 살의를 담은 미사일로 뒤덮였다. 가장 거룩해야 할 시간에 가장 참혹한 폭격이 오가는 역설. 이 이질적인 두 신앙의 평행선 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목도하고 있는가.
무교절의 ‘고난의 떡’과 무슬림 시야의 ‘순교의 눈물’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과 이란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은 양측 모두에게 영적으로 가장 민감한 시기였다. 이스라엘은 유대교 최대 명절인 무교절을 보내고 있었다. 조상들이 출애굽 당시 급히 탈출하며 부풀리지 못한 빵을 먹었던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며,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유대인들에게 이 절기는 단순한 휴일이 아니라 민족의 뿌리와 생존을 재확인하는 생명의 의례다.
반면, 이란을 중심으로 한, 시야 이슬람 세계는 ‘아야메 샤하다트’, 즉, 이맘 알리의 순교 기념일을 지나고 있었다. 라마단의 거룩한 달 후반부에 배치된 이 시기는 시야 파 무슬림들에게 존재 이유를 묻는 통곡의 시간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첫 번째 이맘인 알리가 쿠파 모스크에서 피습당하고 순교하기까지의 3일간, 그들은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와 정의를 위해 피 흘린 성자를 추모한다. 2026년의 봄은, 이 구원의 노래와 순교의 통곡이 공명을 일으키며 서로의 증오를 키우는 휘발유가 되었다.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거룩한 공습’
문제는 이 거룩한 신앙의 에너지가 현실 정치의 날카로운 칼날과 결합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무교절의 ‘생존 본능’을 앞세워 이란의 위협을 선제적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예의 사슬을 끊어냈던 조상들의 기개로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는 논리다. 그들에게 이번 폭격은 또 다른 ‘출애굽’을 위한 방어적 조치로 해석된다.
이란의 반응은 더욱 비장하다. 아야메 샤하다트 기간에 가해진 공습은 단순한 군사적 타격을 넘어 그들의 신앙을 모독한 행위로 간주된다. 알리의 순교를 묵상하며 “불의에 굴복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라는 결사 항전의 의지가 온 나라를 뒤덮었다. 이란 군 당국이 서방의 정보력을 비웃으며 ‘멸절’이라는 단어를 서슴지 않는 배경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야 파 특유의 순교 영성이 자리 잡고 있다. 한쪽은 ‘자유’를 위해, 한쪽은 ‘정의’를 위해 방아쇠를 당겼으나, 결과는 양측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을 파괴하는 참혹한 공멸로 치닫고 있다.
2026년 4월, 정보의 안개와 무너진 중립성
현장의 공기는 차갑다 못해 서늘하다. 테헤란의 거리에는 알리의 초상화와 함께 미사일 파편을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들어섰다. 이란인들은 “우리의 핵심 전력은 서방이 결코 알 수 없는 ‘전략적 심도’에 있다”라며 자신감을 내비친다. 서방 정보기관이 ‘성공’이라 자평한 타격 지점들이 사실은 기만용 미끼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국제 사회의 정보 신뢰도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국제적 연대 역시 균열이 가고 있다. 전통적인 중립국 오스트리아가 미국 군용기의 영공 통과를 불허한 사건은 이번 갈등이 단순히 중동 내 국지전이 아님을 시사한다. 이스라엘의 무교절 식탁에는 평화의 기도 대신 전쟁의 결의가 올라왔고, 이란의 순교 기념집회는 보복을 다짐하는 선전포고의 장이 되었다. 2026년 4월의 기록은 인류가 도달한 최첨단 기술이 어떻게 가장 원시적인 종교적 증오를 증폭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글픈 보고서다.
텅 빈 무덤과 검은 깃발 사이에서
우리는 이번 사태를 보며 깊은 무력감에 빠진다. 유대교의 무교절이 가르치는 ‘자유’는 타자를 억압할 권리가 아니며, 시야 이슬람의 ‘순교’가 가르치는 정의 또한 타자를 멸절시키는 폭력이 아닐 것이다.
무교절의 끝자락에서 유대인들이 소망하는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는 인사는 진정한 평화를 전제로 할 때만 유효하다. 마찬가지로 알리의 순교를 기리며 흘리는 눈물이 타인의 피로 씻겨 내려간다면, 그것은 성자를 기리는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스라엘과 이란, 두 거대한 신앙의 산맥이 서로를 향해 쏟아내는 포성은 결국 자신들의 성소를 무너뜨리는 자폭에 가깝다.
오늘 밤에도 예루살렘의 텅 빈 거리와 테헤란의 검은 깃발 사이로 이름 모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겹쳐 들린다. 신은 과연 어느 쪽의 기도를 듣고 계실까. 어쩌면 신은 자신의 이름을 빌려 살상을 정당화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침묵하며 울고 계실지도 모른다. 2026년의 봄, 우리가 진정으로 굴복시켜야 할 적은 국경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차가운 증오와 오만이다. 떡을 떼는 손과 가슴을 치는 손이 서로를 맞잡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중동의 달력은 영원히 피의 계절에서 멈춰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