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푸른 눈동자의 바이칼 <1부>

여계봉 대기자

 

세계지도를 펼치면 시베리아 벌판 한가운데에 서늘한 푸른색으로 길게 뻗은 바이칼호수를 보면서 파란 눈의 여인이 고혹적인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는 순간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바로 ‘푸른 눈동자의 바이칼’이다. 바이칼 앞에는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가장 깊고, 가장 푸르고, 가장 차갑고, 가장 담수량이 많고, 가장 오래된 호수다. 336개의 강에서 바이칼로 흘러 들어온 호숫물은 단 하나의 앙가라강을 통해 리스크비양카와 이츠쿠르츠를 지나 예니세이강으로, 그리고 북극해로 들어간다.

 

바이칼호수와 부르한 바위

 

문학가를 꿈꾸던 고등학생 시절, 이광수의 ‘유정(有情)’을 읽고 소소한 연애사보다 주인공 최석이 친구 N에게 보낸 편지 속 바이칼 호수의 신비스러운 모습만 상상하면서 늘 그리워한다. 또 시인 백석(白石)의 시 ‘북방에서’는 잃어버린 북방민족의 향수를 자극하니 이는 피가 끓는 청년의 불난 가슴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 된다. 춘원을 따라 톨스토이를 좋아하여 ‘전쟁과 평화’를 읽고 갖게 된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 대한 막연한 환상들. 이런 감정들은 얽히고설켜 바이칼에 대한 향수는 세계 최고 수심을 지닌 바이칼 호수의 심연만큼 깊어만 간다.

 

바이칼의 도시 이르쿠츠크는 이곳으로 유배를 온 120여명의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들이 만든 도시다. 프랑스 파리까지 진군한 러시아 청년 귀족 장교들이 서유럽의 자유분방한 선진문화와 진보된 시민의식에 큰 충격을 받고 러시아로 돌아와 농노를 해방하고 왕정을 전복시킬 계획으로 1825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실패하게 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동토의 땅인 이곳으로 유배를 오게 된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발콘스키 백작은 실존 인물로 쿠데타 주동자인데, 수형 생활이 끝나자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서 데카브리스트들과 함께 브라트족 도시 발전을 위해 헌신하면서 여생을 마친다. 그의 저택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바이칼의 도시 이르쿠츠크 시내

 

이르쿠츠크에서 290km 거리인 바이칼호수의 알혼섬을 향해 출발한다. 서울은 30도를 웃도는 더위지만 이곳은 선선한 초가을 날씨다. 시내를 벗어나자 광활한 초원의 스텝지대가 시작된다. 바이칼로 가는 길은 뜨거운 태양 아래 자작나무로 만든 러시아 전통 목조 가옥, 자유방임형 소떼가 노니는 끝없는 초지가 끝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짙은 타이가 숲, 분홍색 이반차이 야생화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이런 환상적 파노라마가 4시간 동안 수없이 반복되어도 지루하지 않다.

 

버스는 타이가 숲을 헤치고 질주한다. 백석의 시 ‘북방에서’ 중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는 것을 기억한다.’라는 시구는 과거 북방민족으로서의 향수를 자극한다. 우리는 왜 이 나무들을 버려두고 떠났을까? 지금 이 자리에서 비로소 시에 담긴 백석의 심경을 이해한다. 샤먼의 제사 의식에 사용되는 바이칼의 자작나무는 땅과 하늘의 매개체다. 우윳빛 살갗 위에 상처처럼 난 거뭇거뭇한 속살은 마치 신께 나약한 인간을 구원해 주십사하는 증표로 느껴진다.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

 

드디어 지구의 태반인 바이칼호수에 도착한다. 바이(bai)는 풍요, 갈(gal)은 바다를 의미한다. 부두에서 바지선을 타고 숱한 인종들에 섞여서 바이칼을 건너 알혼섬으로 들어간다. 배삯은 내외국인 구분 없이 모두 무료다. 2,500만 년 나이를 먹은 바이칼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남한의 1/3 크기다. 남북 636km, 둘레 2,200km, 최고수심 1,742m, 지구 담수의 20%를 지니고 있다.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 과연 이곳에 서식하는 물범 네르파를 볼 수 있을까. 6만 마리로 추정되는데 갈수록 개체수가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호수는 12월부터 결빙하면 5월까지 얼어있어 배는 운항하지 못하고 군용짚차를 개조한 10인승 우아직이 여행객을 나른다. 바지선에 탄 지 약 10분 만에 제주도 절반 크기의 알혼섬에 도착한다. 

 

알혼섬으로 들어가는 바지선

 

알혼은 브라트어로 ‘나무가 별로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섬에는 나무가 별로 없다. 부두에서 후지르 마을로 가는 비포장 도로길을 우아직이 먼지를 일으키며 신나게 달린다. 구릉길을 달리는 알혼섬의 전천후 교통수단 4륜구동 우아직은 놀이공원 청룡열차다. 광활한 초원을 가로지르며 거침없이 달리는 우아직은 몽골 초원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초원을 질주하는 우아직

 

후지르 마을은 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근처에 지구에서 영기가 가장 센 곳, 샤머니즘의 성지 부르한 바위가 있어 섬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들리는 마을이다. 부르한 바위로 가는 길이 험하지만 고운님 만나려면 힘들고 더디게 찾아가야 그리움이 깊어지는 법이다. 도로 좌우 허허벌판에는 우리에게 나지막이 ‘본향을 찾아 잘 왔노라’ 속삭여주는 들꽃들이 있어 길은 외롭지 않다. 선착장에서 출발한 지 약 50분 만에 섬에서 가장 큰 후지르 마을 근교의 숙소에 도착한다. 호텔 이름이 ‘바이칼로프 오스트록’, 이름에 걸맞게 요새처럼 지은 ‘바이칼 통나무집 요새’다. 

 

후지르 마을의 통나무집 호텔

 

요새 안의 통나무 오두막에 짐을 풀자마자 우아직을 타고 근처에 있는 후지르 마을로 달려간다. 인구 2,500명의 후지르 마을은 브라트족 마을이다. 브라트족은 몽골계인데 몽골 반점, 탯줄을 문지방 밑에 묻는 풍습, 강강술래 춤, 선녀와 나무꾼과 심청전의 임당수 유사한 설화 등 7천 리나 떨어진 우리와 유사한 생활 습관이나 문화가 많다. 마을에서 걸어서 호숫가를 향해 걸어가면 언덕 위에 우리의 솟대를 닮은 13개 세르게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바이칼의 여러 강신들을 모시는 성소다. 우리나라 성황당 나무에 천조각을 매달고 가족과 동네의 무사평안을 비는 의미와 같다.

 

우리의 솟대를 닮은 13개 세르게

 

언덕을 내려서면 호숫가에 영기서린 바위, 샤머니즘의 성지, 세상의 중심, 브라트족 성소, 몽골, 티벳, 탕구트족 발원지, 징기스칸이 묻힌 곳. 바로 부르한 바위가 있다. 브라트족은 선조인 징키스칸이 묻혀 있다하여 바위 위에 절대 올라가지 않는다. 부르한은 하느님, 부처님을 의미하는데, 최남선은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 ‘불함’은 ‘부르한’을 의미하고, 따라서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을 바로 눈앞에 있는 부르한 바위로 규정하였다. 

 

샤머니즘의 성지 부르한 바위

 

바이칼 호수에 손을 담그면 3년, 발은 5년, 몸은 40년 젊어진다고 하는데, 한여름이지만 물이 너무 차서 수영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부르한 바위 언덕은 야생화 천국이다. 가는 꽃대로 바람에 흔들리면서 벌판을 지키는 작은 풀꽃들. 뽀송뽀송한 야생화가 솜이불처럼 나그네 마음을 덮어준다. 

 

호수 주변의 작은 풀꽃들

 

숙소로 돌아와 러시아식 사우나 반야를 즐긴다. 자작나무로 만든 오두막에서 자작나무로 달구진 돌에 물을 뿌리면 나오는 증기를 쐬는데, 이때 자작나무 잎이 달린 가지로 벗은 몸을 가볍게 쳐준다. 뜨거운 열기에 견디기 힘들면 바로 앞 바이칼 호수에서 길러온 차가운 물로 몸을 식힌다. 몇 번 반복하니 여독은 금새 사라진다. 반야 후 호반에 나가니 날씨가 쌀쌀하다. 자켓을 걸치고 바이칼의 낙조를 감상한다. 지금은 ‘나를 찾는 시간’이다. 차가운 호수에 들어가 발을 담근다. 마음도 담근다. 비로소 그동안 잊고 살았던 북방민족의 DNA를 되찾는 기분이다. 소설가 김종록은 바이칼은 내 영혼의 피정지이며 거룩한 자궁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바이칼의 낙조

 

이곳을 피정지로 찾은 춘원과 백석처럼 나도 이곳에서 한민족의 향수를 느껴본다. 해가 장엄하게 수평선을 물들이는 시간, 출렁이는 바이칼 물결이 잠잠해지니 억겁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마지막을 불사르며 소멸해가는 바이칼의 해는 처절하리만큼 아름답다. 호수 깊이만큼 신비로운 자연의 경이로움을 실감하면서 막연한 동경과 가슴속 깊은 본향을 느낀다.

 

 

[여계봉 대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6.07.07 19:23 수정 2026.07.0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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