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하루, 거래처의 일정에 맞추어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전날 차에 실어 둔 물건을 목적지로 곧장 나르는 직근(直勤) 날이 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이상 일찍 집을 나서야 하기에 마음이 분주한 아침인데, 뜻밖에도 면도기가 말썽을 부렸다. 본체와 면도날 카트리지를 연결하는 내부 고정 부품이 오랜 마모를 견디지 못하고 파손된 모양이었다. 아무리 끼워 넣어도 힘을 주는 순간 쏙 빠져버렸다. 결국 급한 대로 카트리지와 본체를 손으로 위태롭게 맞잡은 채 겨우 면도를 끝냈다.
돌이켜보니 참 오래도 썼다. 면도날 카트리지 하나로 1년을 버텼으니, 본체는 족히 5년 이상을 함께했을 것이다. 이 면도기를
들이기 전에는 일회용 면도기 하나를 1년 넘게 쓴 적도 있다. 무언가 대단한 환경보호 의식이나 탄소중립 같은 거창한 가치를 실천하려던 것은 아니다. 그저 쓰기에 불편함이 없으면 손에 익은 대로 쓰는 것이 몸과 마음에 편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는 《명남루수록(明南樓隨錄)》에서 물건을 대하는 인간의 변덕스러운 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아하던 물건도 오래되면 싫증이 나서 마침내 천하게 여겨 버리게 되는데, 이는 그것이 아니더라도 살아가는 데에 손해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玩物之情 久則厭心生 畢至於賤棄 以其雖非此 無所損於生道也)."
혜강이 말한 '완물지정(玩物之情)'은 본질이 아닌 유희의 대상으로 물건을 취하다가, 싫증이 나면 내팽개치는 세태를 꼬집은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아침을 붙잡았던 면도기는 유희의 '완물(玩物)'이 아니라 삶의 '필수품(必需品)'이었다. 그렇기에 나의 정조(情操)는 혜강의 결론과 조금 결을 달리한다. 요긴하고 긴하게 사용하던 일상의 도구를 어쩔 수 없이 폐기해야 할 때 느끼는 감정은 싫증이 아니라 아쉬움, 즉 '석물지정(惜物之情)'에 가깝다.
그러나 아쉬운 정(情)은 정이고, 이치(理)는 이치다. 물건이 제 기능을 잃고 망가졌다면 그것은 버려야 할 때 과감히 버려야 한다. 좋아하여 멀쩡한 물건도 오래되면 싫증이 나 버려지는 마당에, 수명을 다해 파손된 물건을 미련 때문에 계속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온당한 이치가 아니다. 쓸모를 잃은 물건을 방치하는 것은 공간만 차지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일상의 흐름을 방해하는 골칫거리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물건의 이치가 그러할진대, 사람을 쓰는 용인(用人)의 이치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마침 이병태 대통령 직속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사퇴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표면상 사퇴이나 실상은 잇따른 설화(舌禍)에 대한 사실상의 경질이다. 그는 “5.18이 성역이 됐다, 북한의 모습” 이라며 우리 공동체의 보편적 역사인식을 뒤흔드는 망발을 일삼았고, 과거에도 사회적 합의에 반하는 부적절한 언행으로 구설에 올랐던 인물이다. 치명적인 결함이 드러났음에도 자숙하기는커녕, 도리어 언론에 나와 반성 없는 태도로 오만을 떨었으니 청와대의 사퇴 권고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핵심 부품이 부러진 면도기를 억지로 쥐고 쓰면 결국 제 살점을 베이고 피를 보기 마련이다. 공직자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자질과 역사인식마저 결여된 인사를 요직에 앉혀두는 것은, 고장 난 칼날을 쥐고 위태로운 시선으로 국정을 재단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정부와 조직 전체에 치명적인 부담이자 두고두고 큰 화근이 될 뿐이다.
아쉬운 정이나 진영의 논리에 이끌려 적기를 놓치기보다, 공동체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고장 난 인사는 과감히 비워내고 쇄신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시대를 관통하는 순리(順理)이자 변함없는 이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