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탄불의 한 찻집에서 있었던 일
수년 전, 밤이 깊도록 진한 차이(Tea) 잔을 사이에 두고, 오래 알고 지낸 무슬림 친구가 불쑥 물었다. "당신과 나는 같은 신을 믿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신을 믿는가?" 그 물음은 가벼운 안부 같았으나, 안쪽에는 천 년의 무게가 들어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이 세계가 우연의 먼지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한 분의 손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한 분'이 누구이며, 그분이 세계를 향해 무엇을 뜻하셨는가에 이르면 두 길은 조용히 갈라진다.
성경 창세기 1장 1절과 꾸란의 창조 구절
두 구절은 표면에서 분명히 닮았다. 둘 다 창조주 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 닮음의 문턱을 넘어 한 걸음만 안으로 들어서면, 창조를 바라보는 신학의 결과 방향이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같은 별을 올려다보는 두 사람이, 실은 서로 다른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 셈이다.
먼저, 성경이 세계의 첫 장을 어떻게 여는지 본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선언한다. 성경은 이를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라고 풀어 옮긴다. 짧지만 이 한 문장은 우주의 기원을 넘어선다. 여기서 '창조하다'로 옮겨진 히브리어 동사 '바라'는 성경 안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삼는 특별한 단어이다.
인간은 만들고 빚고 다듬지만, 무에서 존재를 불러내는 일은 하지 못한다. 그 일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 이전부터 계신 분, 곧 피조물의 범주에 갇히지 않는 절대적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첫 구절은 단순한 사건 보고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이 그분께 빚지고 있다는 선언이다.
흥미롭게도 꾸란 역시 창조를 거듭 말한다. 닮은 표현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꾸란 6장 101절은 신이 "하늘들과 땅의 창조자"이심을 강조한다. 이어서, 7장 54절은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라고 서술하는데, 이는 창세기 1장이 그리는 '엿새 창조'의 골격과 눈에 띄게 닮았다. 또한, 21장 30절은 한층 더 강렬하다. "하늘들과 땅이 본래 하나로 붙어 있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갈라놓았다"라는 표현은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창조의 그림을 압축해 보여준다. 사막의 천막 아래에서 별을 헤아리던 사람들에게도 세계가 한 분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직관은 절대 낯설지 않았다.
둘 사이에서 결정적 차이는 '창조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서 드러난다.
여기까지만 보면, 두 신앙의 경전은 한 형제처럼 보인다. 실제로 무슬림 친구들과 창조를 이야기할 때, 나는 이 공통의 출발점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창조주를 인정한다는 건, 자기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 아님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꾸란의 창조는 대체로 신의 절대 권능과 위엄,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려야 할 인간의 복종을 향해 수렴한다. 세계는 그분의 무한한 능력을 증언하는 거대한 표적이며, 인간은 그 표적 앞에서 순종을 배워야 할 존재로 그려진다. 이 그림은 장엄하지만,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간격은 끝내 좁혀지지 않은 채 남는다. 신은 높이 계시고, 인간은 낮은 자리에서 그 권능을 우러른다.
반면, 성경의 창조는 권능의 전시에서 멈추지 않는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첫 장부터 말씀으로 빛을 부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거듭 기뻐하시며, 마침내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빚으신다. 이 창조는 곧이어 언약으로, 그리고 인간을 향한 끈질긴 구원의 역사로 흘러간다. 다시 말해 성경의 창조는 한 편의 거대한 이야기의 '첫 문장'이다. 그 이야기는 권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떠난 자녀를 끝까지 찾아오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향해 굽이쳐 흐른다. 창조의 하나님은 멀리 계신 군주이기 이전에,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시는 아버지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복음의 첫머리, 그리고 꾸란
이 차이가 가장 선명하게 빛나는 자리가 요한복음의 첫머리이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창세기의 첫 구절을 다시 받아 든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리고 곧바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고 선언하며, 그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 창조의 첫 장과 복음의 첫 장이 한 문장으로 맞물리는 순간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창조와 구속은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서 만나는 하나의 사랑이다. 세계를 지으신 그 손이, 훗날 인간을 위해 못 박히신 그 손이라는 고백, 바로 여기에 복음의 심장이 뛴다.
그러나 꾸란은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분명히 거부한다. 그 결과 창조에 대한 이해가 구원의 절정과 끝내 연결되지 못한다. 창조는 권능의 증거로 남고, 인간은 순종의 의무 앞에 머문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강을 건너오신 분, 친히 사람이 되신 창조주에 관한 소식은 그 안에 자리를 얻지 못한다.
같은 별을 올려다보던 두 사람의 길이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한쪽은 권능 앞에 엎드리는 자리에서, 다른 한쪽은 사랑 안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자리에서 멈춘다. 그러므로 무슬림 친구를 향한 나의 마음은 정죄가 아니라 초대이다. 당신이 우러르는 그 위대한 창조주가, 실은 당신의 이름을 먼저 부르신 아버지일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의 초대이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그 밤, 찻집의 친구에게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식어 가는 차이 잔을 만지작거리며 오래 생각했다. 우리는 분명 같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그 하늘 너머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두고는 길이 갈린다. 한 분은 멀리서 명령하시는 주인으로 남고, 다른 한 분은 가까이 다가와 잃은 아들을 끌어안는 아버지로 오신다. 나는 후자의 손을 붙들고 살아왔다. 그 손이 우주를 펼치셨고, 그 손이 나를 위해 찢기셨음을 믿기 때문이다. 창조의 첫 문장은 결국 한 사람의 가슴속에서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나는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지어진 존재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