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이슬람의 희생절은 5월 27일경 시작되어 하지(메카 순례)의 절정과 맞물리며, 이브라힘(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려 했던 순종을 기념한다, 그리고 꾸란 자체(22:37)가 "알라께 닿는 건 피가 아니라 너희의 경건"이라고 기록한다.
지금 이 시각, 지구촌 곳곳에서 양과 염소의 울음이 멎는다. 이슬람의 가장 큰 명절, 희생절(이드 알아드하)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메카로 향한 순례자들의 하지가 절정에 이르고, 거리마다 붉은 피와 기쁨이 뒤섞인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칼날이 짐승의 목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경건을 바친다. 나는 오랜 세월 무슬림 이웃들 곁에서 살아오며 이 광경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한 질문이 떠올랐다. 저 수많은 희생의 피는, 과연 어디에 닿는가.
한 아버지, 갈라진 두 길
이야기의 뿌리는 같다. 한 노인이 사랑하는 아들을 제단 위에 올린다. 성경의 창세기 22장과 꾸란 37장은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록한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다고 기록하고, 이슬람의 전통은 이브라힘이 아들 이스마엘을 바치려 했다고 전한다. 참고로, 꾸란 본문 자체에는 이브라힘이 바치려 한 아들의 이름이 '이스마엘'이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 희생 제물로 바치려 한 아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핵심 본문은 꾸란 37장 99~113절인데, 정작 그 희생 장면(37장 102절 전후)에서는 단지 ‘아들(소년)’이라고만 부를 뿐,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부분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아무튼, 한 아버지의 떨리는 손, 그 손에 들린 칼, 그리고 마지막 순간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 세 종교가 입을 모아 증언하는 것은 한 인간의 절대적 순종과 아들 대신 숫양을 준비하신 신의 자비다.
그러나 이 공통의 뿌리에서 길은 갈라진다. 이슬람에서 이 사건은 '순종의 기념'이다. 이브라힘이 꿈에서 명령을 받았을 때 머뭇거리지 않았다는 것, 아들조차 "명령대로 하시라, 저는 인내하겠습니다"라며 순순히 목을 내밀었다는 것. 꾸란은 이를 "선을 행하는 자에 대한 보상"이라 적는다(꾸란 37:105). 그러니 무슬림이 해마다 바치는 희생제는 단순한 풍습이 아니다. 그 옛 순종의 순간으로 돌아가, 같은 헌신을 몸으로 다시 새기는 거룩한 재현이다.
피가 닿지 못하는 자리
여기서 우리는 흔한 오해 하나를 바로잡아야 한다. 많은 이가 무슬림의 양 희생을 '죄를 씻는 제사'로 여긴다. 그러나 이슬람 신학의 정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꾸란은 놀라우리만치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 고기가 알라께 닿는 것도 아니며 그 피가 닿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너희의 경건이 그분께 닿을 뿐이다"(꾸란 22:37). 이는 곧, 이슬람에서 희생의 본질은 피 흘림 자체가 아니라, 그 마음의 경건함이다. 짐승의 죽음은 죄를 대속하는 통로가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을 증명하는 상징이다.
이슬람은 본래 인간의 원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존재가 대신 짊어진다는 대속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슬림에게 용서란 알라의 자비와 인간 자신의 회개와 복종을 통해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생절의 양은 절대 누군가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어린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을 향해 올려보내는 정성의 표식이며, 관행적으로 그 희생된 동물의 고기 삼분의 일은 가난한 이웃에게 나뉘어 사랑의 손길이 된다. 이 점에서 무슬림의 헌신과 자선은 진심으로 아름답고, 그들의 마음을 절대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칼날
그러나 바로 여기서, 율법을 처절하게 지키려는 무슬림들에게 건네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다. 위의 꾸란 22:37에서처럼 만일 양의 피가 정녕 신께 닿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결국 인간 자신의 경건과 노력으로 귀결된다면, 우리의 죄는 도대체 누가 씻어 주는가. 해가 바뀌면 또 한 마리의 양이 쓰러진다. 그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칼날은 멈추지 않고 되풀이된다. 이 끝없는 반복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어떤 정성으로도 끝내 다 채워지지 않는 깊은 결핍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성경 역시 오랜 세월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다. 히브리서는 단호하게 적는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의 용서가 없다고(히브리서 9:22).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고백한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사람의 죄를 결코 온전히 없앨 수 없었기에, 그 제사는 해마다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다고. 되풀이된다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제단 앞에서 같은 질문을 안고 서 있었다. 누가 이 반복을 끝낼 것인가.
단번에, 영원히
기독교의 복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전혀 다른 소식을 들고 온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외쳤다. "보라,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복음 1:29). 창세기의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친히 어린 양을 준비하시리라" 말했던 그 약속이, 마침내 한 사람의 몸으로 응답된 것이다. 기독교가 증언하는 건 인간이 신을 향해 올려보내는 제물이 아니다. 도리어 신이 인간을 향해 내려보내신 제물이다.
여기에 이슬람과 기독교 두 제단의 결정적 차이가 드러난다. 이슬람의 희생절 제단에서는 사람이 짐승을 바치지만, 기독교의 십자가 제단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바치고 있다. 그 방향이 정반대이다. 한쪽은 인간이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는 종교이고, 다른 한쪽은 하늘이 인간을 향해 몸을 굽혀 내려오는 은혜다. 성경 히브리서는 이 사건을 "단번에"라는 한마디로 압축한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자신을 드림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영원히 완성하셨다는 것이다(히브리서 10:10~14). 더 이상 되풀이되는 칼날은 필요하지 않다. 제단의 피는 그날 단 한 번으로 영원히 그쳤다.
성경은 그 사랑의 무게를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로마서 5:8). 우리가 먼저 경건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먼저 순종해서도 아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였다. 이것이 기독교가 이슬람과 갈라서는 가장 깊은 자리다. 한쪽에서 인간은 신의 인정을 얻기 위해 끝없이 올라가야 하고, 다른 한쪽에서 신은 이미 인간을 찾아 끝까지 내려오셨다.

두 제단 사이에서
나는 이 글을, 미움을 가지고 쓰지 않는다. 도리어 신이 내게 보여준 사랑으로 쓴다. 짧지 않은 시간을 무슬림 형제자매들 곁에서 살아오며, 나는 그들의 경건과 정성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누구보다 가까이 보아 왔다. 희생절의 거리에서 가난한 이웃에게 고기를 나누는 그 손길은, 분명 하늘을 향한 진심의 표현이다. 그 마음 앞에서 누구도 함부로 손가락질하지 못한다.
다만 나는 한 가지를 안타까이 여길 뿐이다. 해마다 쓰러지는 그 수많은 양과 염소가, 정작 인간이 가장 목말라하는 단 하나의 소식 — 죄의 용서가 이미 단번에 완성되었다는 그 복된 소식 — 을 향한 길고 긴 그림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두 제단 사이에 선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결국 하나다. 지금 우리는 신을 향해 끝없이 양을 올려보내는 자리에 서 있는가, 아니면 신이 우리를 향해 이미 내려보내신 어린양 앞에 무릎 꿇는 자리에 서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