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국가명이 우선
고조선은 없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닮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국가가 선대의 국가명을 재사용할 때
후대의 국가에는 ‘후’라는 접두어를 붙여 사용하는 일이 상식일 것이다.
예컨대 견훤의 백제는 당연히 후백제일 수밖에 없고,
궁예의 고구리는 후고구리*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견훤의 백제 때문에
예전에 존재하던 온조의 백제를 고백제이라 할 수 없고,
궁예의 고구리 때문에
주몽의 고구리를 고고구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거꾸로 고대의 국가명인 조선을 고조선이라 부르며
고조선이 마치 나라 이름인 양 사용한다.
* 후고구리: 사실 궁예는 후고구리라는 국호를 사용한 적이 없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통일신라가 분열되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를 이은 고려 등 3국이 정립하였던 900~936년 시기”라고 정의하면서, 마치 후고구려가 있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 동북아역사재단은 “후고구려의 건국” “궁예, 고구려를 계승하여 나라를 세우다”라는 제목 아래, ‘개요’라며 “후고구려(後高句麗)는 901년(효공왕 5) ‘고려(高麗)’라는 국호(國號) 아래 궁예(弓裔, ?~918)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는 典據(전거)가 약하여 신뢰성이 떨어진다. 사서인 ‘삼국사’와 설화집인 ‘삼국유사’에는 아예 없고, 제왕운기에만 唐佋大順元庚戌(당 소제 대순 원년 경술년, 890) 稱後高麗立王旌(후고리라 칭하고 왕이라는 깃발을 들었노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삼국사 권11 “진성왕 5년 10월 북원의 적 괴수 양길이 그 부장인 궁예를 보내어명주와 주천 등 10여 군현을 침습케 하였다”와 권50 궁예전에 “진성왕 5년(891) 죽주의 괴수인 箕萱(기훤)에게 의지하려 갔다”는 내용과 배치된다.
조선이란 국호 사용만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고리는 아예 구분도 안 되어 있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고구리로 알고 있는 나라가,
삼국사 외에 소위 중국 문헌에서는 고리라고 기록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은 사서의 원문을 조금이라도 읽었다면
누구나 알게 되는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왕건의 고리는 옛 고리와 구분할 수 없게 되며,
다른 이름이 필요하게 된다.
더욱이 궁예의 후고구리가 있었다면
(제왕운기에 후고리라 하였으므로 후고구리는 전거가 아예 없는 셈이다)
훨씬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현재 이런 명명에 대하여 개선하자는
제안조차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즉 우리나라는 시대명을 부르는 원칙이 없음에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국호를 정하는 원칙
국호를 정할 때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 원칙은 단순할수록 좋고, 접두어를 붙이면
그 접두어에 관한 논리가 명백하여야 한다.
곧 선조의 나라는 그대로 부르고,
후대에 또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국가가
앞 나라의 정통성을 이은 나라임을 강조하느라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국가는 ‘후’라는 접두어를 붙이면 된다.
따라서 고대의 단군의 조선은 그냥 조선일 뿐이다.
곧 최초의 조선이므로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같은 나라의 이름을 몇 번씩 다시 사용하게 된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이런 경우에는 창업자가 주장하는 특정한 명분, 또는 도읍의 위치를 고려하여야 한다.
우리나라 정통 사서에는 기록이 없고,
기준의 조선이 위만이라는 연나라의 망명자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는데,
지나의 사기와 한서에 따르면 그냥 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그 조선 앞에
빼앗은 사람의 이름을 붙여 ‘위만조선’이라 하였다.
이 삼국유사의 위만조선이라는 국호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 나라의 국민도 아니고 타국에서 들어온 자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은,
말하자면 외국인이 정권을 탈취할 셈인데,
그 정권 탈취자의 개인이름을 붙여 위만조선이라고 했다.
그 뒤에 우리나라 사서는 모두 위만조선을 따라서 사용하였다.
설화집이 한 나라의 국호를 결정한 것이다.
* 삼국유사: 아무리 역사적 사실을 전하여주는 내용이 많다 하더라도 설화집에 불과할 뿐, 사서와는 거리가 멀다. 서명 자체가 遺事(유사)다. 遺史(유사, 남겨진 역사?)가 아니다. 내용도 놀랄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낙랑국이라 적어놓고 漢(한)이 조선에서 빼앗았다는 땅의 낙랑군을 서술하였고, 한나라 평주도독부와 동부도위를 二府(이부)라며 마치 우리 역사 속의 한 부분인 양 썼다. 또 72국을 언급한 뒤, 한의 네 군이 78개국으로 나뉜 것으로 기술하는 등 이상하게 말이 뒤틀려 있어 무슨 말인지 요령부득이다. 이런 난해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최남선은 삼국사와 삼국유사 중 선택하라면 삼국유사를 선택하겠다고 선언하였으니, 그의 존중받아 마땅한 연구업적조차 불신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 참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최남선의 선택대로 만약 삼국유사만 남았다면 삼국시대 왕명부터 어찌 알 수 있을지 아득할 뿐이다.
단군의 조선을 고조선으로 부르게 된 동기도 순전히 삼국유사에서 비롯한다. 다만 국호로 사용했다기보다는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 듯하나, 오해를 불러 일으킨 사실은 피할 수 없다.
기자조선은 없었다
설령 스님의 처지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만민을 똑같이 품을 수 있어도
독자는 정권을 탈취당한 사람의 후손일 터이니
독자의 감정을 헤아려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정권탈취자가 아닌 聖者(성자)일망정 동양역사에서
유일하게 개인이름을 국호의 접두어로 사용한 셈인데,
역사상으로 정통성이 없어 참으로 이해되지 않아 난감해진다.
그럼에도 편찬 이래 비판 없이 그대로 사용되고,
또 이성계의 후조선과 같이 역사전문가가 별도로 없던 때라면
마지못해 이해한다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이 소위 사학도가 수만을 헤아림에도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마땅히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
즉 외국인에게 빼앗겼을망정 그 나라에도 정당한 이름은 있었고,
정권을 빼앗은 나라가 빼앗긴 나라의 승계를 선언한 기록이 없다면
정체성이 달라진 것이므로 다른 나라로 다루어야 한다.
여러 경로로 전래되지만, 조선은 이미 서력으로 –239년
마지막 임금(고열가)께서 권력을 5인의 지도자들에게 양도하고
스스로 물러나 수도하러 산으로 들어갔다 하였다.
(단군을 수염이 많은 노인으로 그리는 원인도 이것이라 추정한다.)
그렇다고 삼한으로 나누어 통치하던 조선의 분권 체계가 즉시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진한은 해모수가 오가를 설득하여 공화제에서
다시 단제 일인통치로 환원하며 북부여로 이름을 바꾸었고,
마한과 번한은 각각의 한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그러나 번한이 번조선이 되었던 듯하고,
그 후대의 임금은 기자의 자손인 기후, 기욱, 기석, 기윤, 기비로 이어졌으나
기준이 승계하고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이 내용은 후조선의 이맥이 남겨놓은 ‘태백일사*’ 가운데 ‘삼환관경본기’에 전하여진다.
그 기록대로 기준까지는 번조선이었으니 그대로 번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면 된다.
* 태백일사: 대학 중심의 사학계는 ‘桓檀古記(환단고기)’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위서’라고 단정한다. 그렇지만 오성취루 기록은 1993년 라대일·박창범의 계산으로 기원전 1733년 5월 천문 현상과 일치함이 입증되었고, 태백주현 기록 역시 고천문학적 검증을 거쳤다. 나아가 속속 발굴되는 고고학의 증거와 유라시아 전역의 언어와 풍습 등으로 내용이 계속 인정되고, 다른 유라시아 국가에도 유사한 기록이 남아있어 위서로 단정은 훗날 비난받게 될 것이다.
기준을 쫓아내고 위만은 국호를 그대로 조선을 유지하였더라도 정체성은 바뀌었고,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모두 濊(예) 항목에 기록하고 있어
“예조선”이라 하면 자연스럽겠다.
따라서 사서로 평가하기 어려운 삼국유사를 따르지 않아도 되고,
특정인의 이름으로 국호를 삼았던 예가 없었음에
예외를 만들지 않아도 되는 개운함이 있다.
다음으로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창업한 조선은
시대가 떨어져 있어도 단군의 조선을 잇는다는 명분을 품고 있었고,
왕조실록에도 단군조선 기록이 존재하므로
대안이 없다면 ‘후조선’이라 하면 될 것이다.
아니면 ‘신조선’도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공산당의 괴뢰정권인 김일성의 조선은
그들 자신도 남한의 대립적인 명칭으로 사용할 때
북조선이라 자칭하므로 ‘북조선’이라 불러주면 된다.
‘후조선’이라 하면 걸리는 문젯거리가 하나 남아있기는 하다.
제왕운기에서 “後朝鮮祖是箕子(후조선의 시조는 기자인데)”라며
마치 기자조선이 실제로 존재했던 양 기록하였으나,
이는 명백하게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상서’에서는 상나라(멸망 당시는 은나라) 멸망 이후
주 무왕이 감옥에 갇혀있는 기자를 풀어주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또 사마천의 史記(사기) 송미자세가에
“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되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어디에도 ‘기자’가 왕의 역할을 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제왕운기의 기록에 얽매일 이유는 없다.
고구리와 고리
고리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여 성립한 나라이므로
경합할 나라가 없어 후고리라 하면 명쾌하다.
그러나 삼국사에서 주몽의 고리를 고구리라 이미 명쾌하게 기록을 남겼고,
우리 국민 모두 그리 알고 있으므로 크게 꺼릴 일이 없다.
다만 학자들만 합의한다면 주몽의 고리는 고구리로 부르고,
왕건의 고리도 지금까지 다른 접두어의 필요성이 없던 ‘고리’를 그대로 사용하면 된다.
발해야말로 스스로 고구리를 승계하였다고 선언했고,
일본으로 보낸 외교문서에 고리로 사용한 적이 있다.
뿐만아니라 일본 또한 발해를 향한 국서에 고리를 사용하였다.
그렇더라도 거의 알려진 바는 없다.
한편 ‘발해’라는 국호는 지나사서에 적극 사용되었을 뿐이다.
심지어 ‘발해’조차 고구리의 거의 모든 영역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극도로 고리 또는 고구리가 싫었던지 구당서는 ‘발해말갈’이라 기록하였고,
신당서는 아예 기록조차 하지 않았다.
또 구오대사는 발해말갈, 신오대사는 발해,
송사는 발해국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大震(대진)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고
앞서 소개한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명백하게 쓰여있으니,
굳이 스스로 대진이라는 국호를 두고,
고리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하여, 이 문제에 매일 까닭은 없어 보인다.
필자의 이 글이 학계의 즉각적 동의를 얻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 여러분께서 스스로 사서를 읽으실 때,
국호 표기의 혼란을 직접 확인하시고,
'왜 이런 혼란이 방치되는가'를 질문하시기 바란다.
질문하는 국민이 늘어날 때, 언젠가는 학계도 답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