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의 거친 설원 위에서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를 새로 쓰는 위대한 발자취가 남겨졌다. 만 37세의 나이, 모두가 '황혼기'라 부르는 시기에 스노보드 알파인의 베테랑 김상겸(하이원)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은빛 질주를 선보였다.
현지시간으로 지난 8일, 이탈리아 손드리오주 리비뇨 스노파크에서 펼쳐진 2026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 결승전에서 김상겸은 오스트리아의 전설적인 강자 베냐민 카를과 숨 막히는 혈투를 벌였다. 단 0.19초라는 찰나의 차이로 금메달을 내주었으나, 그가 목에 건 은메달은 이번 대회 대한민국 선수단의 마수걸이 메달이자 한국 스포츠 사상 통산 400번째 메달이라는 경이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번 쾌거는 한국 스키 및 스노보드 역사에 있어 8년 만의 경사다.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이상호 선수가 사상 첫 은메달을 따낸 이후, 설상 종목에서 다시 한번 세계 정상급 기량을 증명해낸 것이다. 특히 김상겸이 기록한 통산 400번째 메달은 1948년 런던 하계 올림픽 역도 김성집 선수의 동메달을 시작으로 지난 78년간 대한민국이 흘린 땀방울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한국은 이로써 동계올림픽 80개(금33·은31·동16)와 하계올림픽 320개(금109·은100·동111)를 합쳐 총 400개의 메달을 보유한 스포츠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김상겸의 이번 은메달은 그야말로 '언더독의 반란'이었다. 예선에서 1·2차 시기 합계 1분27초18을 기록하며 8위로 결선 토너먼트에 턱걸이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를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단판 승부로 진행되는 16강전부터 김상겸의 저력이 폭발했다. 16강에서 슬로베니아의 잔 코시르를 상대로 침착한 경기 운영을 보여주며 기세를 올린 그는, 8강에서 이번 시즌 월드컵 3회 우승에 빛나는 세계랭킹 1위 롤란드 피슈날러(이탈리아)를 격파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개최국 이탈리아의 자존심이자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피슈날러를 꺾는 순간, 리비뇨 스노파크는 정적과 환호가 교차했다.
준결승의 서사 역시 극적이었다. 불가리아의 강호 테르벨 잠피로프를 만난 김상겸은 경기 초반 눈에 띄게 뒤처지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백전노장의 노련함은 후반부 경사진 코스에서 빛을 발했다. 폭발적인 가속도를 붙여 결승선 직전 0.23초 차의 대역전극을 완성하며 결승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비록 결승에서 '디펜딩 챔피언' 베냐민 카를에게 아쉽게 역전을 허용했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의 레이스는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김상겸에게 이번 메달은 12년에 걸친 집념의 결과물이다. 2014년 소치(17위), 2018년 평창(15위), 2022년 베이징(24위)까지 세 번의 올림픽에서 쓴잔을 마셨던 그는 네 번째 도전인 이번 밀라노 대회에서 마침내 포디움에 우뚝 섰다. 서른일곱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체력적 한계를 극복하고 일궈낸 성과다. 경기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메달 하나만을 바라보고 평생을 달려왔는데, 현실로 이뤄지니 꿈만 같다"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특히 "집에서 묵묵히 응원해준 아내와 가족들의 고생이 너무 컸다"며 가족에게 영광을 돌리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한편, 기대를 모았던 평창 은메달리스트 이상호는 16강에서 오스트리아의 안드레아스 프로메거에게 0.17초 차로 패하며 8강 진출에 실패해 아쉬움을 남겼다. 함께 출전한 조완희 역시 예선의 벽을 넘지 못했으나, 김상겸의 선전은 한국 스노보드 팀 전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김상겸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정진한다면 누구든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향후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대한민국 선수단의 첫 메달로 기분 좋은 출발을 알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 김상겸의 은빛 질주는 이제 막을 올린 대한민국 선수단에게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전망이다.
김상겸의 은메달은 단순한 순위를 넘어선 '인간 승리'의 표본이다. 네 번의 도전 끝에 일궈낸 이 결실은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의 400번째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의 눈물과 땀방울이 서린 은빛 레이스는 2026년 밀라노의 설원을 가장 뜨겁게 달군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